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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Aug 21. 2020

불고기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불고기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음식을 본떠 만든 음식”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한바탕 야단이 났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우리 음식 불고기가 일본 야키니쿠(焼肉, やきにく)를 본떠 만든 음식이라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엉터리다. ‘야키니쿠’는 ‘구운 고기’다. ‘불고기=불에 구운 고기=구운 고기=야키니쿠’라니, 그럴듯하다, 결론은, 엉터리다. 우리의 고기 문화, 고기 문화 발달 과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불고기는 야키니쿠와는 뿌리부터 다르다. 


불고기는 수육의 반대말이다. 수육은 ‘숙육(熟肉)이다. 증기로 찌거나 물에 삶은 고기다. 수육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는 방식이었다. 좋아서 수육을 택했던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택했다. 냉장, 냉동이 없던 시절이다. 생고기 보관은 한계가 있다. 한차례 가열처리를 하면 고기 보관 기간이 늘어난다. 날고기를 그냥 먹는 일도 잦지 않았다. 대부분 익혀서 먹었다. 삶거나 찐 다음, 간장, 소금 등에 찍어 먹거나, 다시 양념해서 조리한다. 가장 편하고 위생적이다. 수육이 널리 퍼진 이유다. 

불고기는 수육의 반대말이다. 혹자의 말처럼 야키니쿠를 본뜬 것이 아니라, 야키니쿠와는 뿌리부터 다른 음식이다.

불고기는 ’양념한‘ 고기를 굽듯이 조리해서 먹는 방식이다. 삶거나 찌지 않는다. 수육과 다르다. 한동안 서울 등 대도시에는 수육을 파는 집이 많았다.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주로 돼지고기다. ‘찐 돼지고기’ ‘삶은 돼지고기’가 수육이다. 반드시 돼지고기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쇠고기든, 돼지고기든, 닭고기든 맹물에 삶거나 찌면 수육이다. 


닭고기를 찌거나 삶아서 내면 백숙(白熟)이다. 백숙은 별다른 걸 사용하지 않고 맹물에 푹 찌거나 삶아서 낸 닭고기를 뜻한다. 각종 채소 등 적당한 재료를 넣거나 한약재 등을 넣고 찌거나 삶아도 된다. 그래도 수육이다. 채소나 한약재 등은 맛을 더하는 장치일 뿐 별다른 뜻은 없다. 왜 돼지고기, 닭고기인가? 간단하다. 쇠고기는 비싸다. 서민적인 길거리 식당에서는 가격이 싼 고기를 고른다. ‘돼지고기 수육’이 흔하니, 어느 순간 수육이라고 하면 돼지고기 수육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수육의 발달은 엉뚱하게도 제대로 된 ‘석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쇠는 구리합금이다. 오늘날 우리가 식당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석쇠가 불과 200년 전까지도 드물었다. 구리합금으로 일상의 물건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쇠로 만든 석쇠는 가능하지만, 이 역시 정교하지는 않다. 가늘게 뽑은 구리합금 선으로 정교한 석쇠를 만드는 일은 어려웠다.


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17세기 말, 효종 때 죽었다. 그도 구리합금으로 만든 정교한 석쇠는 보지 못했다. “옥담사집” 중 “식칼을 잡고 회를 저며도 좋고/석쇠에 얹어서 구워도 좋으리”라는 구절이 있다. 이 내용 중 ‘석쇠’는 ‘鐵井燔(철정번)’이다. ‘鐵(철)’은 쇠다. 쇠꼬챙이로 ‘우물 井(정)’자 같이 짠 것이다. 철사도 아니었다. ‘燔(번)’은 굽는 것을 이른다. 흔히 지지는 것, 지짐이 만드는 것을 ‘번’이라 부른다. ‘번철(燔鐵)’은 지짐이를 만들 때 쓰는 솥뚜껑 따위를 이른다. 정교한 석쇠는 아니다. ‘굵고 거친 쇠꼬챙이로 만든, 고기 굽는 도구’ 정도다. 석쇠라기보다는 고기를 굽거나 지지는 큰 무쇠 판에 가까웠을 것이다. 옥담의 시절에도 고기 굽는 정교한 석쇠는 없었다. 석쇠는 구리합금도 아니고, 거친 쇠였다. 


불고기는 쇠고기가 흔해지고, 석쇠를 구하는 일이 쉬워지면서 가능했다. 불고기, 불고기 문화는 조선 후기 시작된다.


조선은 네 번의 기근(飢饉)을 겪었다. 지구 전체가 소빙하기를 겪었다. 곡물 생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영양 결핍이 나타났다. 일본에는 기근 당시 인육을 먹는 그림이 남아 있다. 조선도 마찬가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보다 더 무서운 기근이라고 표현했다. 현종 때 겪었던 경신대기근과 숙종 때 겪었던 을병대기근(1695년, 숙종 21년)이 특히 참혹했다. 조선 8도가 전체적으로 굶주림, 전염병으로 시달렸다. 인구의 5-10%가 기근으로 죽었다. 참혹했다. 쇠고기 불고기가 있었을 리 없다. 


영조와 정조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현종, 숙종 조의 대기근도 끝났다. 생산이 정상적으로 늘어났다. 영조는 계몽 군주다. 생산이 정상화되어도 여전히 고삐를 죄었다. 술 만드는 일을 금하고, 마시는 것도 엄하게 벌했다. 술, 쇠고기를 철저히 금했다. 술은 곡물을 허비하는 것으로 여겼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도구다. 소 도축을 철저히 금했다. 


영조 재위 58년 동안 조선의 경제는 조금씩 나아진다. 강력한 금주, 금육의 혜택은 손자인 정조의 몫이었다.  


18세기에 난회(煖會), 난란회(爛爛會), 난로회(煖爐會)가 등장한다. 조선 후기 쇠고기 문화의 시작이다.

 

연암 박지원(1737~1805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연암집” 제3권_공작관문호_만휴당기에 ‘난회’가 나타난다.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 온 방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파, 마늘 냄새와 고기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공이 먼저 일어나 나를 이끌고 물러 나와, 북쪽 창문 가로 나아가서는 부채를 부치며, “그래도 맑고 시원한 곳이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과 그다지 멀지 않다’ 할 만하구먼.” 하였다.     


난회는 불고기 먹는 모임이다. 난로회(煖爐會), 난회 등을 설명할 때, 흔히,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기록을 예로 든다. “북경 사람들은 10월 초(음력)에 숯불을 준비하여 고기를 구워 먹는데, 이를 난로회라 한다. 지금 한양에서도 중국의 예를 따라 겨울이면 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내용이다. 


홍석모(1781~1857년)는 18세기 후반에 태어났다. 19세기 초 중반의 ‘조선 풍속’을 기록했다. 연암 박지원의 시대보다 50년 이상 뒤졌다. 연암의 글에는 이미 ‘난회’가 자연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내용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파, 마늘 냄새와 고기 냄새가 뒤섞였다고 했다. 단순히 고기를 구운 것이 아니라, 파, 마늘로 양념한 고기를 구웠다. 날 것으로 파, 마늘을 먹었다면 ‘몸에 냄새가 밴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불고기도 미리 양념한 고기를 굽는다. 불고기는 난회, 난로회와 같다. 


‘철립위’라는 표현도 재미있다. ‘철립(鐵笠)’은 쇠 벙거지다. 조선 시대 병졸이나 장교들은 벙거지를 썼다. 쇠로 만들면 쇠 벙거지다. 벙거지를 뒤집으면 중간은 움푹 파인 모양새가 되고, 테두리는 중앙을 따라서 넉넉한 공간이 나온다. ‘철립위’는 철립을 둘러싸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표현이다. 뒤집힌 벙거지에 불을 지피고, 테두리에 고기를 굽는다. 움푹 파인 중간에는 마늘, 파 등을 넣은 양념 혹은 국물이 있다. 고기를 구운 후 양념, 국물에 찍어 먹었는지, 아니면 미리 양념한 고기를 준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고기, 양념을 같이’ 구워 먹었다.

  

전립(氈笠), 전립투(氈笠套)는 털로 만든 털벙거지다. 쇠든 털이든 모양은 비슷하다. 중간이 둥근 모양으로 솟았고, 테두리는 넓은 형태로 동그랗다. 


철립, 혹은 전립 모양의 그릇에 고기를 굽고, 양념을 넣어서 먹었다. 뒤집힌 모자의 움푹 파인 공간에 고기와 채소, 양념 등을 뒤섞어 넣고 끓인다. ‘전립투+골’은 ‘전립투골’이다. ‘전립+골’은 전립골이다. ‘골(滑)’은 섞는다는 뜻이다. ‘전립(벙거지)같이 생긴 그릇에 뒤섞어서 끓인 것’은 전립투골, 전립골에서 전골로 변한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전골이다. 고기와 채소, 양념 등을 뒤섞어 넣고 끓인 음식이다. ‘벙거지 골’이라고도 부른다. 


전골이 ‘전철(煎鐵)’에서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전철은, 쇠로 만든, 고기를 굽거나 지지는 도구를 말한다. 그렇게 만든 음식도 전철이라고 한다. ‘전철+골’이 ‘전철골’, ‘전골’이라는 주장이다. 


철립위, 전립투골, 전철골은 모두 18세기에 시작된다. “입을 즐겁게 하는 탕”이란 뜻을 지닌 ‘열구자탕’도 이 무렵 여기저기 자료에 나타난다. 전골은 열구자탕이다. 영조 후 정조 시대에 이런 쇠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정조도 신하들과 난회, 난로회를 가졌다는 기록도 있다. 18세기 말이다.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쇠고기를 먹는 문화는 널리 퍼진다. 쇠고기가 비교적 흔해지고, 각종 요리 도구가 등장하면서, 한반도에도 쇠고기 문화가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야키니쿠’를 본떠 우리의 ‘불고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엉터리다. 일본의 쇠고기 문화가 시작된 것은 메이지유신(1865년) 언저리다. 난회, 난로회는 100년 이상 앞선다. 


석쇠 등도 마찬가지다. 풍석 서유구(1764∼1845년)는 “임원경제지”에서 “지금은 철망을 쓰니 꼬챙이가 필요 없어졌다”고 했다. 풍석은 18세기 중반에 이미 ‘철망=석쇠’를 이야기한다. 정교한 구리합금 석쇠는 아니더라도 철사로 만든 석쇠는 있었다. 불고기도 있었다. 

양념한 고기와 채소가 버무려져 서울식 불고기판에 조리되는 불고기의 모습.

벙거지를 원형대로 두면 오늘날 서울식 불고기판과 같다. 중간이 움푹 올라가고, 테두리엔 국물을 머무는, 공간이 생긴다. 움푹 올라간 둥근 면에 양념한 고기를 올린다. 채소도 같이 올린다. 수십 년 전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테두리에 고인 국물에 밥을 말아, 비벼 먹었다. 단맛이 강한 양념을 넣었으니 ‘고기+양념 국물’은 강한 단맛을 지니고 있다. 단맛이 강한 고깃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평생토록 잊지 못할 맛이 된다. 


전골 그릇과 서울식 불고기판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그릇, 다른 음식이다. 


부산 동래, 전남 광양 등의 불고기는 석쇠를 사용한다. 구리합금으로 만든 석쇠에 양념한 고기를 얹고 굽는다. 전골이나 서울식 불고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다. 


우리의 쇠고기 문화는 18세기 후반 시작되었다. 우리도 불고기, 전골, 열구자탕 등의 역사가 길지는 않다. 쇠고기는 먹었지만, 금육(禁肉)이었다. 쇠고기 자체가 귀하고, 게다가 국가가 엄격하게 금지했다. 설혹 쇠고기 식육이 허용되더라도 고기 구하는 일이 힘들었다. 


석쇠가 없으면 굽는 고기는 불가능하다. 번철 등에 지지는 방식을 쓸 수밖에 없었다. 꼬치 모양의 산적(散炙)으로 만들었던 이유다. 


‘서울식 불고기’ ‘광양식 불고기’를 나누는 것은 석쇠 등을 이용하여 고기는 굽는지, 아니면 불판 위에서 고기를 지지는지의 차이다. 같은 이름이지만 전혀 다른 음식이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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