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식문화진흥 Aug 28. 2020

맛의 재발견, 토속음식

이명아 토속음식 연구가/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던 오랜 세월 먹어 내려온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전통음식이다. 특정 지역에서 나는 식재료에 특유의 조리법을 더해 만든 그 지방의 전통음식은 흔히 향토음식이라고 표현한다. 영어로 번역하면 ‘Local Food’쯤 된다. 한국음식도 마찬가지다. 강원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올챙이국수나 충남 태안 지역에서 즐겨 먹는 게국지 등을 우리는 향토음식이라고 부른다.      

가자미 한 가지만으로 가자미식해, 밥식해, 물회 등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자미식해는 어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경도 향토음식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자미식해는 생각보다 꽤 많은 지역에서 만들어먹는다. 함경북도 산청부터 강원도 속초, 경상북도 포항, 경주에 이르기까지.     

 

몇 년 전, 경주 김호 장군 고택에서 점심상을 받았던 적이 있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부산첨사 김호(金虎)장군의 생가로 경주월암종택(慶州月菴宗宅)으로 불리는 곳이다. 마침 상 위에 가자미식해가 올랐는데 잘 삭아서 맛이 그만이었다. 자연스럽게 조리법을 물어보게 되었는데 같이 밥을 먹던 사람들마다 알고 있는 방법이 다 달랐다.      


가자미를 엿기름으로 삭혀서 물기를 뺀 후 소금에 절인 무와 조밥, 고춧가루 등을 넣어 버무려 익히는 것은 경상도 식이었다. 가자미를 엿기름 대신 소금으로 절여 꼬들꼬들한 맛을 살리는 방법도 있었다. 같은 경상도인데도 울진에서는 조밥 대신 쌀밥을 넣어 가자미식해를 만드는데 특별히 밥식해라고 부른다고도 했다.      


어머니가 함경북도 북청 출신이라는 이는 가자미를 가져온 그대로 며칠 던져두었다가 나중에 조밥과 나머지 양념 재료들을 넣어서 버무리는 방법을 알려줬다.      


가자미식해 얘기로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날 대화의 결론은 이러했다. 함경북도 추운 지역에서는 가자미를 며칠 쯤 바깥에 두어도 상할 일 없이 그저 조금 발효가 이루어질 뿐이니 그때 양념해서 버무리면 오래 삭히지 않아도 바로 먹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겨울이라도 추운 날이 그리 많지 않은 경상도에서는 어림없는 얘기라는 것. 잠깐 방심하면 생선이 상해버리기 십상인 곳이니 말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굳이 ‘향토음식’ 대신 ‘토속음식’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던 건.      


‘속’은 한자로 ‘俗’으로 쓴다. 사람인(人)과 골곡(谷)이 합쳐진 말이다. 사람들이 골짜기에 모여 살면서 익혀진 풍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향토’가 아닌 ‘토속’에 방점을 찍고 보니 같은 음식이라도 집집마다 만드는 방법과 맛의 특징, 모양새가 달라지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지리적 여건과 기후의 특성, 특별히 많이 나는 식재료에 따라 같은 음식이라도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호박을 얇고 길게 썰어 말린 호박오가리. 지역에는 같은 식재료를 두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된 음식들이 존재한다.


사람살이의 모습을 드러내는 토속음식      

미역국 하나만 보더라도 소고기 미역국, 홍합 미역국, 가자미 미역국, 바지락 미역국, 들깨 미역국 등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가 있다.      


육개장 역시, 서울식은 파만 듬뿍 넣어도 되지만 대구 사람들은 토란대와 무가 빠진 육개장을 상상하지 못한다. 울릉도에서는 씹을수록 고기 맛이 난다는 삼나물 말린 것을 물에 불려 고사리대신 사용하고 전라도에서는 봄에 많이 나는 죽순을 삶아 찢어 넣어 육개장을 끓인다.      


미꾸라지를 푹 삶아 뼈를 추린 후 추어탕을 끓일 때, 전라도에서는 시래기나 배추 우거지를 넣는다. 들깨를 갈아 넣어 걸쭉한 맛을 살리는 경우도 많다. 전라남도에서는 부추, 실파를 밀가루에 버무려 넣고 달걀로 줄알을 치기도 한다. 먹을 때는 제피가루를 듬뿍 넣어 맵싸한 향을 즐긴다.      


경상북도 사람들은 맑은 추어탕을 좋아한다. 된장을 엷게 풀고 연배추를 삶아 넣어 맑게 끓이는 식이다. 제피가루가 아닌 매캐한 방아잎을 다져 넣는다. 충청도에서는 호박잎을 넣거나 애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넣기도 한다. 


같은 재료로, 비슷한 음식을 만들어내지만 그 양상이 사뭇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은 꽤 흥미롭다.      


구룡포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에게 꽁치국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4월에 잡히는 꽁치를 곱게 다져서 반죽하듯 섞은 다음 끓는 물에 숟가락으로 뚝뚝 떠 넣어 끓인다는 것이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풋마늘. 그걸 같이 다져 넣어야 맛이 한결 좋다는 거였다. 곰곰 생각해보니 4월이면 한창 풋마늘이 올라올 시기였다. 우선 손에 잡히는 것이 그것이니 파 대신 풋마늘을 넣었으리라.      


이튿날, 포항 시내에서 만난 청어횟집 주인에게 꽁치국 얘기를 했더니 울릉도가 고향인 횟집 주인은 다진 꽁치에 밀가루를 더해 역시 반죽하듯 섞은 다음 수제비 떠 넣듯 국을 끓여 먹었다는 추억 한 자락을 보태주었다. 당장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꽁치 나는 계절이 아니니 다음을 기약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아 몇 년을 맘속에만 두었더랬다.      


몇 년이 지난 후, 포항 한적한 어촌에서 만난 꽁치국은 그 전에 들었던 음식들과는 또 결이 달랐다. 구룡포에서 나오는 꽁치를 뼈째 곱게 다져 동글동글 굴린 다음 엷은 된장국에 배추 넣어 끓여냈다. ‘꽁치 당구국’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무와 콩나물만 넣어서 시원하게 끓인 맑은 국에 꽁치 반죽을 떠 넣어 끓이다가 고춧가루를 풀어먹기도 한다고 했다.      


꽁치국의 각기 다른 서너 가지 조리법을 확인하는데 꼬박 3년이 걸렸지만 지루하다고 느껴본 적 없고, 조바심에 애태우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언젠가 만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토속음식에서 늘임음식으로      

요즘은 교통이 좋아져 전국 어디를 가던 대여섯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해남 땅끝 마을 선착장이나 목포 여객터미널을 제집 드나들 듯 자주 오가는 편이다. 많을 때는 한 달에 서 너 번을 헤아리기도 한다. 어느 한 해는 목포 여객터미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배만 바꿔 타가며 비금도, 신의도, 도초도 등을 차례로 돌아본 적도 있다.     


섬사람들 우스갯소리가 있다. ‘섬 처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 먹으면 잘 먹은 거라’는. 어떤 섬은 서 말이고, 또 다른 섬은 한 말이다. 궁핍한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쌀이나 보리는 귀하고 우선 흔한 것은 생선이나 해초일 터. 자연스럽게 늘여 먹는 음식을 궁리하게 되었다.      

섭, 삼치, 그리고 청산도 만의 독특한 늘임음식. 죽처럼 보이는 이 독특한 음식은 삼치국물에 소라살 다져넣고 쌀가루를 보태 꺼룩하게 끓인 것이다.

전라남도 섬에서 많이 잡히는 고등어나 삼치는 구워도 먹고, 쪄도 먹지만 대가리나 뼈도 버릴 수가 없다. 푹 고아서 국물을 낸 다음 죽을 쒀먹는 일이 허다하다. 여기에 자연산 홍합인 섭이나 소라 살을 다져 넣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재료가 신선하고 좋으니 뼈 우려낸 국물인지, 푸진 살점 넣어 고아낸 국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청산도 섬사람들 제사상에 올리는 탕은 삼치국물에 소라 살 다져 넣고 쌀가루 조금 보태 꺼룩하게 끓인 것. 그마저도 넉넉지 않은 집에서는 밀가루를 대신 넣었다고 한다. 궁핍한 살림 끝에 나온 방편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맛은 심히 좋다. 노인들의 근기를 돋워줄 보양식이나 어린 아이 이유식으로 그만한 것이 없겠지 싶다.   

   

강원도 산골의 범벅도 그러하다. 옥수수 알갱이, 수수 알갱이에 팥, 강낭콩 등을 넣어 푹 끓인 그것은 설탕을 넣지 않아도 은은한 단맛이 돈다. 한 그릇 먹으면 우선 배는 부르지만 더부룩하지 않아 좋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식의서(食醫書)인 『식료찬요(食療纂要)』에서는 갱미(粳米), 청량미(靑粱米),  직미(稷米), 대두(大豆), 호마(胡麻), 의이인(薏苡仁), 대맥(大麥), 소맥(小麥), 녹두(綠豆), 적소두(赤小豆) 등을 쓰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각각 쌀, 차조, 기장, 콩, 깨, 율무, 보리, 밀, 녹두, 팥 등인데 죽을 쑤어 먹거나 육수에 넣어 끓여 먹음으로써 기운을 돋우고 병증을 치료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궁핍한 시기에 명줄을 이어주었던 죽과 미음을 최근에는 성인병 예방이나 치료식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많은 거친 음식들은 전국 곳곳에 산재한 토속음식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늘임 음식에 더 많은 마음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흥미를 돋우는 별미 음식이기도 하려니와 몸의 균형을 맞춰줄 건강식으로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현대 조리용어의 범주에 다 담아낼 수 없는 ‘절이고, 삭히고, 무치고, 푹 고아’ 만드는 우리 토속 음식. 볼수록 신통하고 알수록 귀한 문화이다. 그러니 더 열심히 찾아내고, 귀하게 보존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 매일이 보물찾기인 셈이다. 행복한 삶이지 싶다.




이명아 토속음식 연구가는' 우먼센스', '행복이 가득한 집' 등에 음식 전문기자로 활약했고,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 객원교수이다. 조선일보 '헬스조선', 서울문화사 '리빙센스', 농어민신문사 'Korea Agra Food' 등에 한국음식문화 칼럼을 연재했고, 한식재단이 낸 <맛있고 재미있는 한식 이야기>, <한국, 맛을 따라 떠나는 여행>, 휴먼 앤 북스의 <경주 음식문화 여행서 - 신라왕이 몰래간 맛집> 등을 집필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한식문화진흥사업은 2018년부터 매해 지역 한식문화 콘텐츠를 기획, 취재하고 콘텐츠를 만들어 누리집을 통해 서비스해왔습니다. 한국음식문화 누리집 "토속음식 내림음식"에서 지역 곳곳의 음식문화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