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식문화진흥 Sep 04. 2020

쇠고기 이야기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우리는 부여, 고구려의 ‘맥적(貊炙)’을 물려받아 쇠고기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다수설이다. 근거 없는 엉터리다. 


시작은 육당 최남선(1890~1957년)의 ‘맥적 이야기’다. 내용은 간단하다. “우리 선조인 부여, 고구려 민족은 ‘맥적’ 방식으로 고기를 먹었다” 이 표현은 맞다. 문제는 쇠고기 문화와 맥적을 연관시킨 것이다. 엉터리다. 

엉터리는 힘이 세다.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하니 “우리의 쇠고기 문화는 뿌리가 깊고, 전통이 깊다”고 여긴다. ‘우리 민족’까지 버무리니 은근히 자부심도 생긴다. 많은 이들이 육당의 '맥적’을 여기저기 인용한다. “불고기의 시작이 바로 맥적”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내용은 점점 더 ‘풍부’해진다. 어느 순간 맥적과 설하멱적(雪下覓炙)이 뒤섞인다. 


‘설하멱적’은 조선 후기의 음식이다. 발음이 비슷하지만, 전혀 관계없는 음식이다. 맥적과 설하멱적은 15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눈 아래서 찾는 고기’라고 하니 낭만적이다. 맥적=설하멱적? 그럴듯하지만 아무런 연관이 없다.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지나며 1500년이 흐른다. 그동안 쇠고기 문화는 그리 발달하지 않는다. 먹긴 먹되, 찜, 수육 정도다. 불로 굽는 설하멱적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설하멱적은 청나라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청나라 기록에 “10월 초순(음력)에 쇠고기를 마련하여 숯불에 구워 먹는다”는 내용이 있다. 난로회(煖爐會)다. 마침 한반도도 쇠고기가 비교적 흔해지면서 중국 측의 이런 풍습을 따라 한다. 우리의 쇠고기 문화가 풍부해진다. 눈 내리는 초겨울, 쇠고기를 연하게 구워 먹는 방식이 나타난다. ‘설하멱적’이다. 맥적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음식이 느닷없이 끌려 나왔다. 코미디다. 


‘맥적’은 어떤 음식일까? 중국 백과사전 ‘바이두[百度]’에서 “수신기(搜神記)”를 인용하여 맥적을 설명한다. “수신기”의 내용이다.       


晉 乾寶 《搜神記》 卷七: “羌煮, 貊炙, 翟之食也
(진 건보 수신기 권칠: 강자, 맥적, 적지습야)"

  

“수신기”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절, 진나라(동진) 간바오(干宝, ?~336년)가 기록한 책이다. “바이두”가 “수신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하는 맥적은 간단하다. “진나라 ‘수신기’ 제7권에 이르길, 강자, 맥적은 오랑캐의 식습관이다”라고 설명한다. 최남선이 인용한 책도 바로 이 “수신기”다. “맥적은 오랑캐의 음식이다”. 이뿐이다. 불고기도, 설하멱적도 없다. 


강자(羌煮)의 ‘강(羌)’과 맥적(貊炙)의 ‘맥(貊)’은 모두 오랑캐다. ‘강’은 중국 서쪽 티베트 방면의 이민족이고, 맥, 예맥은 동북쪽의 이민족이다. 중국 중심으로 오랑캐라고 기록했다. 적(翟) 역시 오랑캐라는 뜻이다. 


엄밀하게 가르자면, ‘강자’가 맥적 보다 앞선 음식이다. ‘강자(羌煮)’의 ‘자(煮)’는 끓인다는 뜻이다. 맥족은 구워 먹었고, 티베트 쪽 이민족은 끓여 먹었다. 구워 먹는 고기가 더 맛있을 수는 있지만, 음식 문화적으로는 끓이는 음식이 앞선다. 끓이는 음식은 그릇과 양념이 필요하다. 맥적은, 오늘날 바비큐와 닮았다. 야외에서 별다른 그릇이나 주방 도구 없이 고기를 구워 먹는 식이다. 꼬챙이에 고기를 꿴 다음 불에 굽는다. 고기가 익는 대로 각자의 칼로 잘라 먹는다. 야생의 방식이지, 문명의 방식은 아니다. 


중국 사전 ‘바이두’는 “석명(释名)”을 바탕으로 맥적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한다. “석명”은 한나라 사람 유희(劉熙, 생몰년 미상, 서기 160년 무렵에 태어남)가 기술한 책이다.  


맥적은, 오래전 수렵 어로 시대의 방식이다. 취사도구가 필요 없다(不需要炊具, 불수요취구). 이민족, 오랑캐의 고기 구워 먹는 방식이다. 통째로 구운 후, 각자의 칼로 잘라 먹는다고 표현한다. 초원유목민의 방식이지 문명의 방식은 아니다. 우리의 불고기와는 전혀 다른 음식이다. “우리의 불고기가 맥적과 닿았다”는 주장은 틀렸다. 조금, 조금씩 부풀리다가 엉뚱한 그림을 그리고 말았다. 불고기는 취사도구와 그릇을 쓰고, 양념이 있다. 문화적인 음식이다.  


더 우스꽝스러운 내용도 있다. 맥적의 대상은 쇠고기가 아니다. 돼지 혹은 양이다. 어린놈을 불에 통째로 굽는 방식이다. 깊은 산속이다. 농경 지역이 아니니, 소는 드물다. 야생의 돼지, 양 등을 잡아서 먹는다. 더러 가축으로 기르기도 한다. 소는 사냥의 대상이 아니다. 소가 아니라, 돼지, 양 등을 먹었다. 맥적이 소도 아닌데, 굳이 맥적을 설하멱적, 불고기와 엮는 것도 우습다. 


“수신기”의 작가 간바오는 서기 3~4세기 사람이다. “석명”의 작가 유희는 2세기 사람이다. 맥적은 그 이전의 음식이다. 한반도의 쇠고기 문화는 18세기 이후다. 약 1500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그 사이에 맥적이나 불고기와 닮은 요리법은 없었다. 설혹 맥적이 우리의 음식이었다고 한들, 1500년 이상 동안 아무런 변화, 발전이 없는 음식을 두고 전통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우습다. 


부여, 고구려의 맥적을 물려받아 우리의 쇠고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참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엉터리다. 불행히도, 많은 이들이 맥적은 우리 쇠고기 문화의 시작이라고 여긴다. 인터넷이나 책에 흔히 나오는 내용이지만 엉터리다. 책이나 인터넷 어디에도 ‘맥적의 발달이나 쇠고기 문화의 발전’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은 없다. 


한반도의 쇠고기, 고기 문화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먼 과거로 잡아도 거란, 몽골의 침략 시기다. 그 이전에는 고기가 귀했고, 만질 줄도 몰랐다.


양성지(1415~1482년)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세종부터 성종까지 6명의 왕을 모셨으며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공로가 있다. 양성지는 상소문에서 한반도 ‘고기 문화의 시작’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1456년) 3월 28일의 기록이다.       


(전략)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韃靼)’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중략)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옛 이름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열어 주었으나, 그러나 지금 오래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중략)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戶首)를 죄 주고 또 3대(三代)를 범금(犯禁)하지 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한가지로 편호(編戶)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백정, 화척, 재인, 달단은 가축을 도축하는 이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민족이다. 자기들끼리 결혼하고 소 도축, 도둑질, 악기를 타거나 구걸한다. 언제 한반도에 들어왔을까? 최초는 거란의 한반도 침략기다. 


몽골의 고려 침략기에 고기 문화가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틀렸다. 그 이전이다. 양성지는 5백 년 전이라고 했다. 거란의 고려 침략 시기다. 거란, 요나라는 거란족, 여진족의 국가다. 유목민족이다. 달단 족은 타타르(Tartar)다.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까지 진출했다. 타타르 족의 육회는 우리의 육회 문화와도 닮았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요나라와의 전쟁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온 유목민족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은 모두 세 번 있었다. 993년, 1010년, 1018년이다. 양성지가 상소문을 올린 1456년을 기준으로 ‘약 5백 년 전’이 맞다. 5백 년 동안 유목민족들은 한반도에서 자기들의 습속을 그대로 유지한다. 불법 도축이다. 

고구려 시대 맥적이 한반도 고기 문화, 불고기와 연관이 있다는 표현은 틀렸다. 몽골의 영향으로 고기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표현도 틀렸다. 거란 침략기에 고기를 잘 다루던 유목민족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이들이 고기 문화를 퍼뜨린다. 거란의 침략 이전에는 한반도에 고기 문화가 없었다. 


고려는 곡물, 해산물 위주의 식사를 했던 농경민족이었다. 1123년 무렵, 송나라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의 고기 만지는 솜씨가 형편없다”고 이야기했다. 돼지를 제대로 손질도 하지 않고, 그대로 불에 구웠다. 심지어 냄새가 난다고 전한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거란의 고려 침략 100년 후다. 여전히 고려인들은 고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세조 2년(1456년) 양성지가 상소문을 올린 후, 이민족들의 불법 도축은 사라지지 않는다. 11년 후인 세조 13년(1467년) 1월, 도승지가 된 양성지가 다시 상소문을 올린다. 상소문에서 양성지는 “옛날에는 백정(白丁)과 화척(禾尺)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경외(京外)의 양민(良民)들도 모두 이를 잡으며, 옛날에는 흔히 잔치를 준비하기 위하여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 안에서 판매하기 위하여 이를 잡고, 옛날에는 남의 소를 훔쳐서 이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에서 사서 이를 잡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민족의 불법 도축은 점점 심해진다. 이민족인 백정, 화척뿐만 아니라 조선의 양민들도 불법 도축을 한다. 고기 문화가 널리 퍼진 것이다. 이런 불법 도축, 쇠고기 식육 문화는 조선 왕조 내내 진행된다.  


화척, 재인, 달단은 숙종(1661~1720년) 이후 기록에서 사라진다. 외부에서 들어온 유목, 기마 민족들은 서서히 한반도에 흡수된다. 이민족은 한반도 사람들과 뒤섞인다. 하층민인 ‘백정’이 된다. 더는 이민족이 아닌, 하층민이지만, ‘조선의 백성’이 된 것이다. 


고기 문화는 서서히, 제대로 자리 잡는다. 제법 시간이 흐른 후인 정조 시대, 기마민족의 나라 청(淸)의 육식 문화가 전래 된다. 불고기의 시작인 난로회, 난회, 전골 등이다. 오늘날의 전골, 불고기 등의 원형이다. 거란의 고려 침략은 10세기다. 정조의 시대는 18세기다. 800년 동안 유목민은 서서히 한반도에 동화한다. 백정은 하층민이지만 우리 민족이다. 이제는 화척, 재인, 달단 등 동화되지 않은 이민족은 아니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