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추어탕’의 이름은 여러 개다. 한글로는 ‘미꾸라지탕’이다. 풍석 서유구(1764∼1845년)의 “난호어목지”에서는 ‘밋구리 탕’이라 부르고, ‘이추(泥鰍)’로 표기했다. ‘이(泥)’는 진흙, 흙탕물을 뜻한다. 진흙 구덩이에 사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추어탕의 다른 이름으로는 추두부탕(鰍豆腐湯)도 있다. 오주 이규경(1788∼1856년)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통추, 갈추라는 표현도 있다. 추탕과 추어탕으로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재 ‘고등어 추어탕’도 등장했다.
많은 이름만큼이나, 미꾸라지탕, 추어탕에 대한 궁금증도 많다.
“우리는 언제부터 추어탕을 먹었을까?” “이른바, 남도식 추어탕과 서울식 추어탕은 어떻게 다를까?” “추어탕 마니아들은 ‘통추’가 진짜 추어탕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일까?” “남도식에는 산초를 쓰고, 서울식은 산초 가루를 쓰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말일까?” 등등 의문이 숱하다.
추어탕, 미꾸라지탕의 역사는 짧다. 대중적인 식당에서 내놓은 것은 불과 100년의 역사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에 ‘추어탕’이 나타날 뿐, 조선 시대 기록에도 “길거리 주막에서 미꾸라지탕, 추어탕을 먹었다”는 내용은 없다.
음식점에서 내놓는 메뉴로서의 추어탕이 아니라 ‘미꾸라지를 먹은 역사’는 길다.
풍석 서유구와 오주 이규경은 18~19세기를 살았던 사람이다. 200년 전 사람들이다. 풍석 서유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반도에서 미꾸라지탕을 먹었음을 이야기한다. 풍석의 ‘밋구리탕’은, 농촌 사람들이 논배미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자연스럽게 끓여 먹는 모습을 그렸다. 주막에서 내놓는 정식 메뉴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미꾸라지를 오랫동안 먹었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 1091~1153년)은 “선화봉사고려도경(고려도경)” 제23권_잡속2에서 고려의 서민들이 먹는 생선 종류를 설명한다.
어(漁)/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ㆍ전복[鰒]ㆍ조개[蚌]ㆍ진주조개[珠母]ㆍ왕새우[蝦王]ㆍ문합(文蛤)ㆍ붉은게[紫蟹]ㆍ굴[蠣房]ㆍ거북이다리[龜脚]ㆍ해조(海藻)ㆍ다시마[昆布]는 귀천 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구어 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래 먹으면 싫어진다.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 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하나 성과를 거두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다하여 이를 주워도 없어지지 않는다.
서긍이 고려에 온 것은 1123년 무렵이다. 지금으로 셈하자면, 900년 전의 일이다.
물론 미꾸라지를 먹은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바닷물고기 잡는 일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먹고 싶은 생선을 잡아서 먹던’ 시절이 아니라 ‘쉽게 구할 수 있는 생선 중 독이 없는 것, 맛이 거북스럽지 않은 것들’은 모두 먹었다. 선사시대의 패총(貝塚)에서 여러 종류의 조개껍질이 나타난다. 모두 손쉽게 바닷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역시 먹고 싶어서 먹었던 것이 아니라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개이기 때문에 먹었다.
맛있는, 먹고 싶은 생선이 있지만 쉬 잡을 수 없다. 그물, 배 등이 모두 고기잡이를 하기에 넉넉하지 않다. 굴, 대합은 잡기에 비교적 쉽다. 그래서 굴, 대합 등을 먹는다. 더 좋은 점도 있다. 아무리 주워도 여전히 굴, 대합은 흔하다. 그래서 먹는다.
미꾸라지도 마찬가지다. 민물에서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붕어나 피라미, 미꾸라지 등이다. 전국 어느 논배미, 개울, 하천, 웅덩이 등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먹지 않을 이유는 없다.
제대로 된 음식 꼴을 갖추지 못했던 ‘미꾸라지탕’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그럴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鰍豆腐湯(추두부탕)’이다.
추두부탕. 진흙, 모래가 있는 계곡물에서 미꾸라지를 잡는다. 많이 잡아 물을 담은 옹기에 넣는다. 오륙일 동안 진흙을 토해내게 한다. 진흙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매일 세 번 물을 갈아준다. 솥을 걸고 두부를 큼직하게 썰어 넣는다. 물을 붓고 미꾸라지 5, 60마리를 넣는다. 솥에 불을 때면, 물이 점점 뜨거워진다. 미꾸라지들이 뜨거운 기운을 피해, 두부 속으로 들어간다. 계속 불을 때면, 물이 끓고 미꾸라지들이 익는다. 꺼내서 두부를 자른다. 두부 군데군데 미꾸라지들이 박혀 있다. 기름을 두르고 전으로 부친다. 교맥분(메밀가루)과 달걀 부친 것 등과 섞어서 탕을 끓인다. 이 탕이 맛있으니 요즘 한양의 반인(泮人)들이 즐겨 먹는다.
오주 이규경과 풍석 서유구는 동시대 사람이다. 18세기에 태어났고, 19세기에 활동했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풍석의 ‘밋구리탕’과 오주의 ‘추두부탕’은 전혀 다르다. 풍석의 밋구리탕은, 농가, 서민들이 먹던 ‘이름이 없는 음식’이다. 미꾸라지로 끓였으니 미꾸리탕이다. 별다른 레시피도 없고, 절차도 복잡하지 않다.
같은 시대의 음식임에도 오주 이규경의 ‘추두부탕’은 전혀 다르다.
미꾸라지를 잡는 곳, 미꾸라지가 진흙을 뱉어내게 하는 방식을 꼼꼼히 기록했다. 진흙을 뱉어내기 전, 하루 세 번씩 물을 갈아준다고 꼼꼼히 기록했다. 당시로는 상당히 귀한 두부를 사용한 것도 특이하다. 날두부를 쓰는 것도 아니고, 기름[香油]에 지진 두부다. 두부에 미꾸라지가 박혀 있으니, 이걸 두부 탕이라고 해야 할지, 미꾸라지탕이라고 해야 할지도 불분명하다. 당시로써도 혼란스러우니 ‘추두부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재료도 미꾸라지, 두부, 향유, 달걀, 메밀가루 등으로 복잡하다. 그저 미꾸라지 넣고 적당히 끓여 먹은 것이 아니다.
누가 먹었을까? 풍석의 밋구리탕은 누가 먹었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저 농촌에서 농민들이 먹었다는 정도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특이하게 누가 먹었는지 밝힌다. ‘반인(伴人)’들이다.
반인은, 성균관에서 노역하는 노비들이다. 신분은 노비지만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독특한 사람들이다. 성균관의 제사나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학자들의 뒷바라지는 반인들의 몫이었다. 중요한 공자 사당 제사와 장차 조선을 운영할 선비들의 뒷바라지를 하니 조선 사회도 이들은 특수계급으로 여겼다. 반인들이 무리 지어 사는 반촌(泮村)은 외부인의 출입 자체가 어려웠다. 죄인들이 죄를 짓고 반촌으로 들어가면 별도의 ‘압수수색 영장’이 필요했다.
반인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학자들의 식사도 관리했다. 식사 중 중요한 재료는 쇠고기다. 국가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매달 일정한 쇠고기를 공급했고, 쇠고기 관리는 반인들의 몫이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조선 사회에도 쇠고기가 비교적 흔해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국가에서는 쇠고기 유통과 소의 도축을 금했지만, 정조 시대를 지나면서 쇠고기 유통은 비교적 자유로워진다. 반인 중에는 백정들이 있었고, 쇠고기 유통을 아는 이들도 많았다. 조선 후기, 반인들은 한양을 중심으로 쇠고기 도축, 유통을 독점한다.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반인들은 재력가로 발돋움한다. 신분은 낮지만, 이익이 높은 쇠고기 유통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것이다. 지방과 다른, 호화로운 추두부탕을 반인들이 즐겨 먹은 이유다.
일제강점기의 기록에는 한양식 추어탕과 지방의 추어탕이 뒤섞인다.
1920-30년대 서울 청계천을 중심으로 추어탕 가게들이 문을 연다. 여전히 서민들의 음식이지만 서울식 추어탕은 상당히 화려하게 발전한다. 지방 농경 지역의 추어탕은 ‘된장 푼 물’을 육수로 사용하지만, 서울의 추어탕은 ‘고깃국물’을 육수로 사용한다. 기름기가 많은 소의 내장이나 여러 가지 부위를 넣고 육수를 낸다. 진흙을 빼낸 미꾸라지를 통째로 넣고, 대파, 양파, 버섯 등 채소를 더하여 추어탕을 끓인다. 귀한 두부나 유부 등도 넣는다. 지방에서는 산초 가루를 쓰지만, 서울은 고춧가루를 주로 사용했다. 산초는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잘 자란다. 지리산 기슭의 호남, 영남에서 제피, 초피라고 부르는 것들로 매운 향신료다. 서울 사람들은 여전히 산초 가루가 어색했다.
지방의 추어탕은 비교적 간단하다. 미꾸라지를 삶아서 뼈를 추린다. 된장 푼 물로 육수를 잡는다. 삶은 미꾸라지 살만 모아서 육수에 넣고 끓인다. 얼갈이배추나 단맛을 내는 채소를 넣는다. 한양, 서울식처럼 고기 육수도 아니고, 여러 가지 채소를 넣는 것도 아니다. 간단하다.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에서 문을 연 추어탕 가게들은 상당히 화려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농경 지역의 추어탕과는 달리 ‘식당에서 파는 추어탕’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남원추어탕’ ‘원주추어탕’ 등이 등장한다. 모두 농경 지역의 미꾸라지탕과 닮았다. 고기 육수도 아니고, 화려한 고명도 아니다. 남원추어탕은 좀 더 다양한 채소를 사용한다. 원주추어탕은 맹물로 끓이지만, 강원도식 막장을 넣는 정도다. 식당의 메뉴로 등장하면서 좀 더 화려해졌으나, 서울식 추어탕처럼 고기 육수는 아니다. 두부, 유부 등을 넣는 것도 아니다.
미꾸라지를 통째로 사용하는 통추나,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 내는 ‘갈추’는 의미가 없다. 전국적으로 뒤섞였다. 지방에서도 통추를 내놓는 집이 있고, 서울에서도 갈추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산초도 마찬가지다. 교통, 유통이 발달하면서 서울에서도 산초를 사용한다. ‘산초의 비누 냄새’ 때문에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산초는 대중화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은 여전히 산초를 찾는다. 이제 산초는 서울에서도 흔해졌다.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