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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Feb 04. 2021

1. 할머니 된데요!

축복 속 결혼과 나만 기뻐하지 못했던 임신

32살에 8년 친구이자 연상녀인 데이지(아내의 영어 이름)와 결혼했다. 서로 잘 아는 만큼 이것저것 잴 건 없었다. 친구였을 때 내가 호주 여행을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면서 영어를 공부해야 했었다. 데이지는 우리 집에 와서 영어 과외를 무료로 해줬고 작은 성의로 점심을 대접했다. 우리 집 식사자리는 매우 조용하고 엄숙하다. 하지만 데이지와 같이 점심을 먹는 시간만큼은 너무 활기차고 재밌었다. 그런 데이지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버지는 나한테 물었다.

“넌 왜 저런 여자 안 만나냐?”

“남자 친구 있어요”

우린 서로의 연애를 축복해줄 뿐 사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랬던 데이지와 사귀게 되면서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알렸다. 어머니는 그간 내 연애에 대해 크게 관심도 없었고 나 역시 부모님에게 연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20대의 첫발을 내디뎠을 때 "책임질 일만 하지 말아라!"라고 뼈 있는 조언 한마디 했었다. 20대 후반에는 "어차피 인연 아닐 거면 빨리 헤어져라"라는 말을 했을 뿐 만나는 사람 있냐는 물음표를 단 한 번도 나한테 던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데이지와 사귈 때에 만큼은 신기하게도 부모님께 소개해드리고 싶었다. 두 분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시던 여자라 그랬던 걸까, 왠지 자랑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어머니는 데이지와 사귄다는 얘기를 듣고는 3년 전 그 인상이 좋았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셨다.

“잘해봐”라고 짧게 대답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저녁식사 후 날 불렀다.

"너 뭐, 걔랑 결혼할 거냐?"

"네! 결혼하려고 사귀는 건데요?"

"그 친구 집에 허락은 받았냐?"
"받으러 갔다 오면 되죠!"

부모 승낙도 안 떨어졌는데 당연히 난 결혼할 수 있다고 장담하곤 곧바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뵈러 갔다. 당당하게 '까짓 거 인사드리러 가면 되지'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만나 뵙고 선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했다. 장인어른에게 술을 따르는데 너무 떨린 나머지 질질 흘리던 기억만 강하게 남았다. 이후 좋은 분위기 속에 상견례와 식장 예약까지 쾌속으로 진행이 되었다. 결혼 준비하던 중 마음이 어려웠던 점은 내가 아는 우리 어머니와 타인이 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조금은 달랐다는 점이다.

"우리 어머니는 그런 사람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그런 사람이 맞았다. 드라마에 나오는 막장 시엄마는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어머니는 아녔다. 어머니의 형제자매가 많기 때문에 그간 받은 만큼 대접해야 했기에 받은 현금 예단의 절반만 돌려주셨다. "다 돌려줄 거야" 라며 호언장담 했던 나는 좀 당황했었고 오히려 데이지가 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고는 날 안심시켜줬다.


한 번은 겁도 없이 내가 신혼여행지를 결정하려고 했다가 데이지와 큰 싸움이 벌어졌다. 데이지의 아는 언니가 신혼여행으로 유럽의 크루즈 여행을 했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면서 비용을 확인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현실적인 데이지가 스튜디오 촬영을 생략했기에 조금의 여유는 있지만 크루즈 여행 비용이 좀 부담되니 저렴한 곳으로 여행 가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가 버스 뒷자리에서 정말 소리소리를 질렀다. 이때 데이지는 이미 임신 중이었단 사실을 우리 둘은 몰랐다. 결혼 준비 때문에 예민한데 임신이라 한껏 더 예민했던 것이다.


어느 날 데이지가 아무래도 몸이 이상하다며 임신테스트기를 사 갖고 왔다. 나는 설마 하여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설마는 역시 설마였다. 다음날 아침 데이지는 나한테 말했다. “찰리 한! 나 임신했어”

누군가에게 임신은 축복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한테 그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임신이라니! 물론 우린 결혼하기로 했는데 임신이라니!!!'

뭔가가 잘못됐다. 그놈의 휴대폰 어플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아빠들은 임신테스트기에 두줄이 그어진 걸 확인한 후 기뻐하며 아내를 껴안으며 뭐 먹을래 라고 물어보는 스윗한 행동들 따위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흔히들 말하는 속도위반을 한 것이다. 교회 친구들에게, 그리고 동생들에게 이 사실이 들킬까 봐 부끄러웠다. 부끄러운 건 둘째치고 가장 두려웠던 건 바로 부모님께 알리는 것, 좀 더 정확히는 예비 장인어른 장모님께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 였다. 머리채 잡히지 않을까, 소중한 딸한테 이게 무슨 짓이냐며 혼나지 않을까.

데이지 역시 이런 일들을 걱정했지만 너무 기뻐했다. 그러나 난 기뻐할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입덧하는 데이지를 위해 입덧에 좋은 게 뭐가 있는지 폭풍 검색을 했다. 속이 매스껍기에 탄산수가 좋다고들 하는데 인공 탄산수가 아닌 천연 탄산수가 좋다고 해서 맛없는 탄산수 두 박스를 사서 정작 내가 다 마셔버렸다.

기뻐하는 데이지를 보며 철이 없는 건지 왜 이런 상황이 기쁠까 하며 임신에 대한 각자의 온도차가 달랐지만 부모님에게 소식을 알려야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좋지 않던가! 그래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찰리 한이니? 무슨 일 이야?"

"어머니! 할머니 될 것 같아요"

"뭐??"

"어머니... 할... 할머니 된다고요!"

"...... 그래? 축하해! 데이지 몸은 좀 어떠니?"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잠시 멈칫하고 상황 파악이 끝난 어머니의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소리는 혼내거나 안타까운 탄식의 소리 없이 오히려 축하한다고 말하는 그 대답이 너무 낯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당신 할아버지 된대!" 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이해를 못하시고는 "내가 60 넘었는데 할아버지지 뭐야?" 라고 답하셨단다. 사실을 안 후에야 떠나갈 듯이 기뻐했다고.

'아니 도대체가 결혼 전인데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왜 나 빼고 다 행복하냐고!'

왜 저리들 기뻐하는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우리 부모님 두 분은 잘 해결된 듯했다. 문제는 딸을 키우는 부모님의 입장이다. 데이지는 형님을 만나 뵙고 임신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형님과 장모님은 데이지에게 극대노를 하셨다. 하지만 예비사위를 제일 반기지 않는다는 장인어른이 기가 막힌 한마디를 하셨다.

"나이가 몇인데 피임을 해? 빨리 가지면 좋지" 하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이로써 몇몇만 기뻐하지 않은 새로운 생명이 데이지의 몸에서 자라고 있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우린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으며 몇몇 사람들만 아는 아이를 갖은 채 식장에 들어갔다. 눈부시게 빛나는 데이지가 계단으로 내려와 장인어른의 손을 잡고 내게로 걸어왔고 그 손을 장인어른에게서 건네받고는 우리는 부부의 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축가할때 절대 나한테 뭔가을 시키지 말아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동생 놈들이 기어이 나에게 당근을 건네며 하모니카 부는 흉내를 내라고 했다. 한껏 꾸미기 위해 청담동에서 새벽 4시부터 분장이란 분장을 열심히 했지만 결국 땀을 흘리며 놈들이 시킨 미션을 겨우 완료했다.

하지만 그날 하루만큼은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고 24시간 이란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선물이 아닌 나만을 위한 선물 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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