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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Feb 06. 2021

2.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왜 그 확률에 우리 아이가 있어?

데이지의 임신으로 산부인과를 머리 털나고 처음 방문했다. 여느 병원에서나 맡아볼 만한 익숙한 냄새는 나지 않았고 출산에 대한 방송만 계속 나왔다. 병원이라기 보단 뭔가 카페 같은 대기실 분위기였다. 데이지와 함께 검사실에 들어가 초음파 검사를 받는데 화면엔 웬 곰돌이 같은 게 보였다. 여기가 머리, 여기가 몸이라는 등 설명을 하면서 "참 귀엽네요"라고 하는데 이게 뭐가 어디가 어떻게 귀여운지 잘 모르겠다. 12주 차에는 목 투명대 검사를 했다. 보통은 3mm 안쪽으로 들어오면 정상인데 첫째님은 약간 더 두껍다면서 혹시 모르니 양수검사를 권유했다. 그땐 한창 결혼 준비를 위해 분주했기에 다음으로 미루고 식이 끝난 16주 차 즈음에 받기로 했다.

 


선물 같았고 꿈만 같았던 결혼식을 마치고 데이지의 직장동료가 예약해 준 호텔에서 축의금을 세었다. 돈 세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고 했는데 정말 신나서 돈을 세었다. 그리고 명부를 보며 받은 액수를 잘 기록했다. 결혼하는 지인들 역시 이 즐거운 기분을 맛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신혼여행지는 아쉽지만 임신으로 인해 크루즈 여행은 포기했다. 20년 후에 가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가까운 제주도로 결정했다. 남은 돈으로는 임신한 데이지의 출퇴근 및 여행을 함께하기 위한 우리의 발이 되어줄 달구지 중고차를 구매했다.

난 제주도를 29살에 처음 가봤다. 당시 데이지와 친구였을 때 다른 친구와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었고 그때 막 호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기에 한국의 바다나 해변 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제주도 김녕해수욕장을 방문하고선 깜짝 놀랐다. 호주의 그 아름다운 해변과 바다가 제주도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반갑기도 했고 감동 먹을 뻔할 정도로 좋은 기억이 있어서 어중간한 동남아시아보다 제주도를 선호했고 데이지 역시 그 의견에 찬성했다. 신라호텔에서 조식을 배 터지게 잘 먹고 심야영화를 보면서 데이트하는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제야 양수검사라는 숙제가 생각났고 금요일 저녁, 검사를 위해 병원에 갔다.

아이가 자라는 자궁에 바늘을 넣어 뽑다 보니 검사가 끝나면 적어도 2~3일은 휴식을 취해야 했기에 금요일 저녁으로 예약을 잡아주셨다. 검사시간은 협조만 잘 된다면 10분 정도 걸리는 간단한 검사였다. 협조만 잘 된다면 말이다. 데이지는 침대에 누웠고 우리를 진료해주셨던 여의사님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길고 긴 바늘을 들고 환한 미소와 함께 입장하셨다.

'에이! 설마 저게 주삿바늘이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의사님은 망설임 없이 주사기에 그 길고 긴 바늘을 꼽는 것이었다. 데이지는 바늘에 대한 극한의 공포를 갖고 있었기에 소리 지르는 건 어떡해서든 참았지만 이상한 횡설수설을 시작했다. 의사님은 여러 가지 상황을 다 겪어봤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아내의 횡설수설을 잘 받아주는 동시에 자궁 쪽을 초음파로 비추며 아이의 위치를 확인한 후 바늘을 찔렀지만 뜻대로 들어가질 않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내한테 말했다. "산모님! 배에 힘 빼세요!"

데이지는 그 길고 긴 바늘을 보자마자 온 몸에 힘을 꽉 줬고 당연히 배와 자궁 쪽 역시 잔뜩 힘을 주었기에 바늘이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의사님은 데이지가 힘을 뺄 수 있도록 조곤조곤 대화를 하면서 바늘로 찔렀지만 바늘이 휘어져버렸다. 인간이 극한의 공포에 맞닥뜨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듯 데이지 역시 그 힘을 마구 표출하고 있어서 검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저도 이거 해봤어요. 정말 싫어요. 근데 해야만 해요. 그러니 힘 빼셔야 해요!"

의사님의 공감이 섞이면서도 채찍이 아닌 당근을 살살 던져가며 힘을 빼도록 유도했지만 데이지는 바늘을 보고는 다시 힘을 바짝 줬다. 그때 의사님이 말했다. "바늘이 들어갔어요. 이제...."

정말 어렵게 바늘을 자궁으로 찔러 넣었다. 자궁벽 쪽에 바늘이 들어가려는 모습이 초음파를 통해 보이는데 이 무식한 첫째님이 글쎄 바늘이 들어오는 곳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 경험 많던 의사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바늘을 빼야 했다. 그렇게 10분이면 끝난다는 양수검사는 1시간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준비한 여분의 바늘은 어느덧 마지막 1개가 남았고 이것마저도 휘어진다면 다음으로 미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다음으로 미룬다면 데이지는 절대 병원에 오지 않을 것이다. 힘겨워도 오늘 내로 무조건 끝내야 했기에 데이지한테 긴장을 풀 수 있도록 대화를 했지만 고통스러운 데이지 에게는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려고 준비 중일 때 마침 병원장님이 지나가다 무슨 일인지 보고는 직접 바늘을 잡고 쑤욱 밀어 넣어서 겨우 양수를 뽑았다. 다행히 첫째님도 들어오는 바늘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양수를 채취할 수 있었고 데이지가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했던 난 땀범벅이 되었고 데이지 역시 바늘로 여기저기 찔렸기에 많이 아파했지만 끝났다는 안도감에 약간의 눈물을 흘렸다. 결과는 1주일 정도 후에 전화로 알려준다고 했고 주말은 정말 집에서 푹 쉬었다.


1주일이 지난 토요일이었다. 난 회사에 일이 있어 출근을 했다. 눈부시게 밝은 토요일 오전 햇살을 받으며 기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화면에 뜬 데이지의 모습이 보였다.

"찰리 한! 집으로 좀 와봐!" 

별일이 없다면 전화하지 않았을 텐데, 별일이 있는 것 같았다. 집으로 가는 내내 아주 큰일은 아닐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장애아이가 아니라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의논하고 결정해야 할 사항들이 결과로 나왔다'는 희망을 갖고 집에 도착하여 안방에 있는 데이지한테 걸어갔다. 데이지는 나를 보곤 너무나 차분하게 말했다.

"찰리 한! 왔어? 여기 잠깐 누워봐!"

"어떻게 결과가 나왔데?"

데이지 옆으로 누웠더니 나를 바라보고는 안아주면서 말했다.

"여보! 내 얘기 잘 들어"

"응! 뭐래? 별일 아니라고 하지?"

"우리 아기.... 다운증후군 이래"

"..... 뭐?"

무슨 소리인지 똑똑히 들었다. 다운증후군이라는 단어를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내 입에서는 "그게 무슨 소리야?"라는 반문이 튀어나왔다. 농담일 것 같았다. "속았지? 뻥이야! 집에 빨리 오게 하려고 내가 거짓말한 거야"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서프라이즈는, 그런 거짓말은 없었다. 데이지는 짧게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을 보자마자 지금 이 말이 진짜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슬프고 괴로워서 울어야 하는데 믿기지 않아서 울 수 없었다. 울지 않고 침묵했다. 이대로 현실을 받을 순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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