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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Mar 05. 2021

1. 찰리한의 커피 이야기

두서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비싼 커피!

어렸을 적 부모님이 마시던 커피를 보면서 한 번은 맛보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은 이랬다.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져!"

지금에선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카페인이 자라나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좋은 건 아니다. WHO에서 발표한 성인의 카페인 적정량은 있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에겐 가급적 마시지 않는 것을 권장하니 머리가 나빠지는 건 모르겠지만 여하튼 좋은 건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다고 그 당시 부모님이 WHO에 전화를 걸었거나 지인 찬스를 이용한다 해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으레 커피는 식후에 마시는 아주 달달하면서 정신이 번뜩 드는 음료이자 어른들의 문화였기에 아이들에게는 권하지 않았다.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마시는 어른들의 그런 문화!


둘째 놈이 그때 내 나이가 되어 처갓집에 놀러 가면 장인어른이 손수 커피를 타서 준다. 아주 달달하게 설탕 한 4스푼 가뿐히 넣고 숟가락으로 퍼주면 맛있다며 먹다가 컵을 잡고는 들이켜버렸다. 카페인이 대량으로 들어갔으니 각성효과를 본 둘째 놈은 정말 정신 나간 아이처럼 쉴 새 없이 떠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재밌긴 했지만 좋아 보이진 않았다. WHO의 자료를 찾아보면서 좋지 않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알게 됐으니 어쩌다 가는 처갓집에서 마시는 커피 이외에는 절대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커피를 언제 처음 마셨는지 생각했다. 확실하게 기억나던 건 초등학교 5학년 때 수학여행 가서였다. 당시 숙소 복도에는 자판기가 있었고 캔커피를 판매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먹고 싶어서 2박 3일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 짐을 쌀 때 분주한 틈을 타 선생님의 눈을 피해 얼른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누른 후 숙소로 갖고 와서 가방으로 가린 채 한 모금 마셨다. 맛은 생각보다 달지 않았고 진한 보리차에 우유 넣고 설탕 좀 넣은 맛이었다. 이런 걸 왜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버리기 아까운 그 캔 커피를 다 마시고부터는 커피에 손댄 적은 기억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커피를 마신적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 땐 그래도 잠을 깨기 위해 카페인이 필요했지만 카페인이 잠을 깨는, 각성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 기껏 콜라 종류의 탄산음료나 당시 에너지 드링크라는 약국에서 파는 우리가 아는 익히 흔한 것들을 마셨을 뿐이다.

대학생이 되고 나선 행동반경이 넓어지다 보니 스타벅스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거의 촌놈 같은 느낌으로 뭘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도 몰랐고 종류가 너무 많아 메뉴판을 읽다가 10분은 서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수줍음도 많아서 직원에게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때 시켰던 건 바로 프라푸치노였다. 차갑지만 아주 달달했고 가격은 꽤 나갔지만 뭔가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남들 눈에 스타벅스 가면 뭔가 좀 있어 보였기에 돈도 없는 놈이 점심은 삼각김밥 먹으며 아낀 돈을 프라푸치노에 쏟아부었다. 이게 바로 된장남이었던 걸 당시엔 정의할 단어는 없었다. 그저 허세가 아주 오지네요 정도?


2008년에는 홍대 쪽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 일을 했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대학생활을 뭔가 특별한 이벤트 없이 졸업하는 게 아쉬웠기에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고 휴학을 했다. 그리고 파트타임을 구했는데 마침 홍대 쪽에서 교회 동생이 일한다며 소개해줬다.

건물주의 아들이 운영하기에 비싼 것들이 즐비했다. 와인도 150만 원짜리를 판매했고 커피머신도 있었다. 커피는 꽤 비싸다던 이탈리아의 명품 illy 커피를 사용했다. 빨간색에 흰 글씨로 적인 그 로고는 항상 고객들을 향해 돌려놔야 했다. 어쩌다 반대로 돌려놓으면 매니저와 건물주 아드님이 엄청 혼냈다. 그게 뭣이 그리 중헌지도, 뭣이 그리 유명한지도 모른 체!


스타벅스 커피의 단가와 일리 커피의 단가는 거의 4배 정도 차이 난다고 매니저가 강조하면서 커피를 한잔 내려줬다. 나에겐 블랙커피라고 알고 있던 그건 아메리카노라고 한다. 거무티티한 그 맛없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니 내키지 않았지만 스타벅스보다 비싸다니까 호기심에 한잔 마시고는 바로 뱉었다. 써도 너무 썼다.

한약은 잘 마시는 편이었다. 한약은 그래도 뒤에 달달하거나 고소한 향은 나기 때문이지만 이건 그냥 시작부터 끝까지 쓴 맛밖에 없었다. 한 모금 마신 후 더 이상 안 마시겠다고 하니 매니저는 이게 얼마나 비싼 건지 알고 그러냐며 다음부터 안 준다고 버렸다.

절대 안 먹는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다이아몬드의 원석은 다이아몬드를 다루는 사람들이나 알지 나 같은 일반인이 원석 본다고 뭐 알까 하는 그런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날부터 머릿속에는 맴도는 생각이 스타벅스보다 비싼 커피였다. 당시 나에겐 스타벅스가 커피의 최고봉이며 비싸고 고급진 커피였기에 그것보다 비싼 저건 왜 저리 맛이 없을까 하며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나 비싼데 다 못 마신 것이 아쉬운 전형적인 한국인의 특성이 튀어나왔고 비싸니까 억지로 마시기로 다짐하며 다음날 오픈 1시간 전에 와서 매니저 몰래 한잔을 마셨다. 역시나 기대치 이하의 쓴맛 밖에 없었고 버릴까 하다 한 번은 끝까지 마셔봤다. 그렇게 일주일을 한잔씩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쓰디쓴 그 맛에서 약간의 다른 맛이 나기 시작했다. 씁쓸하긴 한데 뭔가 한약처럼 약간의 고소한 향이 났다. 그리고 계속 먹다 보니 아주 약간의 캐러멜 맛 같은 뒷맛도 나면서 아주 조금의 신맛도 느껴졌다. 그때부터 매니저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고서 하루 한잔은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게 됐다.


이탈리아의 유명 커피인 일리를 입에 달고 다니며 주변 친구들에게 아메리카노에 대한 찬양을 시작했다. 2008년에는 지금의 아내와 교회의 행정팀장과 총무로 만나서 여러 가지 사업구성을 위해 카페를 자주 갔다. 그러다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가 있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서 아내와 첫 방문을 했다. 아메리카노에 조금 자신이 있는 나는 당당하게 사장님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메뉴판에 핸드드립이라는 희한한 종이가 보였다. 나라별 커피가 있고 가격도 아메리카노보다 비쌌다. 이 커피들은 뭔데 이리 비쌀까 하고 그냥 넘어가던 찰나 분명 스타벅스보다 일리가 비싸서 먹다 보니 신기한 맛이 났으니 이것들도 뭔가 독특한 맛이 있을 거라 판단하곤 과테말라 핸드드립을 주문했다. 아내는 장인어른의 딸답게 달달한 커피를 좋아하기에 설탕 4스푼을 넣고 마셨다.

사장님은 과테말라 커피를 그라인더에 갈고는 이상한 깔때기에 종이를 끼워놓고 주전자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드립을 시작했다. 커피 쫌 안다고 잘난척하며 사장님께 물어보는데 드립 중에는 집중해야 했기에 다 내린 다음 얘기해주겠다며 잠시 말을 아끼셨다.

커피가 나오고 한 모금 마셔보라 했다. 아이스로 주문했기에 단숨에 한 모금 마셨다. 마시고 나서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쓴맛과 아주 조금 신맛, 아주 조금의 캐러멜향만 있던 커피와는 너무나 달랐다. 아주 쓰지 않았고 신맛도 좀 더 강했고 다 마신 다음 캐러멜향이 엄청나게 올라왔다. 그리고 뭔가 숯불향이 나는 진짜 독특한 커피였다.

사장님은 맛이 어떠냐고 물어봤고 맛의 느낌을 죄다 설명하니까 숯불향은 스모키 향이고 과테말라 지역은 화산토양이라 스모키 향이 나며 로스팅은 어떤 포인트로 하면 어떤 어떤 맛이 난다는 설명을 시작했다.

커피의 신세계였다. 아메리카노 좀 마실 줄 안다면서 자랑했다가 그만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는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이 빙산의 일각이란 사실을 알고 나선 바로 겸손모드로 돌입했다.

그렇게 커피와 정말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지금까지도 그 연이 지속되고 있다. 이젠 커피의 정보나 원두의 프로파일, 내 취향, 로스팅 포인트, 드립의 종류나 방법, 머신 사용 등등을 배우면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지만 언제나 내 마음속 그 과테말라 커피는 잊히진 않았다.



아내의 동료분이 스타벅스 쿠폰을 마구 남발하셨다. 본인도 선물 받았는데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남편과 데이트하라고 보내준 그 쿠폰을 아내와 갈 시간이 없다 보니 나 혼자 마구마구 사용하는 중이다.

20대의 그 시절, 그 달달한 프라푸치노 마시다가 일리 커피 마시고선 핸드드립의 세계에 빠지다 보니 스타벅스를 내 돈으로 사 먹으러 간 적이 10년 동안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니 스타벅스를 간 적이 1년에 2,3번 될까 할 정도로 안 갔었다. 최근 쿠폰을 받고는 버리긴 아깝고 남주 자니 선물 받은 쿠폰이라 아침에 아이들도 없겠다 하며 자유시간을 위해 사용하러 방문했다.

프라푸치노 같은 달달한 것이 아닌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켰고 커피를 맛봤다. 블론드라는 블랜딩 원두가 있어서 맛이 궁금해 한 모금 마셔보니 분명 라벨지에는 2 shot이라 쓰여있는데 너무 연했다. 이게 과연 2 shot이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커피의 뭔가 독특한 향도, 맛도 나지 않았다. 그냥 너무 연해서 뭔가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핸드드립으로는 에티오피아 계열 커피를 이 정도로 연하게 하면 꽃향과 베리류의 향이 정말 폭발할 정도로 코와 목을 감싸는데 여긴 그런 맛도 안 났다. 공짜로 마시니까 다행이지 내 돈으로 사 먹었다면 당장 프런트에 가서 샷 추가를 했을 것이다. 물론 절대 진상을 부리진 않는다. 그 느낌 아니까!


커피 취향이 많이 변했다. 슈퍼 초 달달 커피에서 이젠 향으로 커피를 마시다 보니 스타벅스의 커피는 아쉽지만 나에게 더 이상 최고이며 비싼 커피는 아니었다. 문화공간이자 타인에게 기프트콘을 보내는 브랜드 네임으로는 훌륭했지만 난 커피 맛을 더 중요시하니깐!


하지만 어릴 적 자판기에서 뽑아먹었던 그 캔커피는 가끔씩 마신다. 취향은 변했지만 추억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그 캔커피는 판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맛도 크게 변하지 않았기에 "내가 커피 처음 마실 땐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라는 추억은 덤으로 마실 수 있으니 세상에서 제일 값지고 비싼 커피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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