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 대한 인식을 누군가는 개선시켜야 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됐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 아니 남들의 시선에선 꼭 그렇진 않았다. 큰 잘못을 지었기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내가 그러했듯이!
물론 그런 말을 듣는다고 상처 받지는 않았다.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그 정도의 말은 장난처럼 들릴 뿐이었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장애아이를 가진다는 건, 장애를 가진다는 건 불행한 삶과 일치하는 건 아니다.
부모님에게 알 수 없는 잘못을 한 것 같았지만 잘못은 아니라고 했다. 차츰 두 분 모두 첫째 아이의 장애를 억지로라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힘들지만 시간이 약이 되듯 조금씩 인정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저 애틋한 마음이 가득하여 자나 깨나 손녀 생각만 했고 어머니는 쿨한 척 안부만 물었다. 내색하진 않아도 참 많이 울고 기도했을 것이다. 어쩌면 결과가 바뀌지 않을까 하며 간절한 마음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우리 역시 가득했다. 검사의 정확도가 99.999%라고 해도 0.001%의 오류가 우리 아이에게 해당됐으면 하는 마음은 항상 있었다. 막상 출산했는데 짜잔 하고 비장애 아이가 나왔으면 하는 그 마음은 부모님보다 더 간절했을 것이다. 헛된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현실 속 주어진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교회에 이제 막 결혼한 부부들의 모임에서 우리의 상황을 알렸다. 다들 20대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놀라기도 했고 안타까워했지만 위로의 말을 쉽게 건네지는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 당당하게 아픔을 떨쳐버렸고 출산하여 잘 키울 수 있다는 다짐을 해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결정했으니까 잘 출산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기도 부탁만 했다. 그리고 앞으로 다들 아이를 낳고 기른다면 우리 아이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는 먼 미래의 일들을 얘기하면서 모임을 마쳤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 아이의 상황을 알리면서 지내고 있는데 이상한 위로를 들었다.
"아니 엄마 아빠가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앞날이 불행해진다는 걸 예측하거나 현 상황이 불행하다면 그 이유를 찾아야 했고 자연스럽게 과거의 잘못들을 들춰보며 책임을 묻게 된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리도 힘든 삶을 겪는가 하는 투정과 불만을 표출해야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했다. 그게 타인의 잘못이나 책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편하게 욕해주면 됐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장애아이를 갖게 됐을까 라며 위로를 해주는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안타까움에 대한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했던 위로였고 윗세대로 갈수록 더 많이 이런 위로를 해줬다. 무슨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잘 알기에 그래도 그들의 위로에 감사하고 또 고마웠다.
장애아이를 키운다는 건 삶이 힘들고 불행하다고 생각들 한다. 불행하면 불행했지 행복한 삶을 살긴 어렵다는 그 생각을 부정하진 않는다. 장애아이를 키운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건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도, 지나가는 모르는 타인들 역시도 잘 안다.
하지만 장애는 잘못을 해서 생기는 건 아니었다. 살아온 삶에 큰 죄를 지었으니 앞날은 그 죄에 대해 회개하며 살아가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진다면 유전일 수도 있고 확률에 의한 돌연변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전체 장애인 261만 명 중에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은 사람의 비율이 73.3%나 된다.
이런 통계자료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고 설득 한다한들 그들의 마음이 바뀌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데이지와 결심했다.
우리가 행복한 모습을, 행복하게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면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게 어쩌면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