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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Aug 30. 2021

10. 미안해! 아프지?

출산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자세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마음의 준비는 아무리 해도 준비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후회만 하고 또 내 삶은 왜 이렇게 불행할까 라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첫째님은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데 아빠인 나는 안타까움에 눈물만 흘렸지 응원의 말 한마디 조차 건네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선 아이를 향한 간절한 마음은 제발 살아줘! 였다.



처음 겪는 출산으로 데이지와 나, 첫째님은 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가끔 간호사들이 들어와서 아이와 데이지의 상태를 체크하거나 식사시간에 밥을 주는 정도였다. 출산한 지 6시간이 넘어가고 점심을 먹을 때부터 첫째님에게 연결된 산소포화도, 맥박 센서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얼른 간호사를 불렀고 센서를 지켜보던 간호사는 아이의 호흡이 조금 약하거나 숨 쉬는 게 힘들어 보인다며 산소호흡기를 권유했다. 신생아라 얼굴에 맞는 호흡기는 없고 코로 바로 연결시키는 튜브 형태로 얼굴에 테이프를 붙여 콧속으로 넣어야 했다. 첫째님은 이제 막 태어났는데 뭔가를 붙이는 게 싫었는지 울었다.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건 힘들지만 잠시만 붙이고 있으면 금세 좋아질 것이라는 말에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았다. 우는 아이의 코에선 계속 호흡기가 빠지고 테이프를 얼굴에 더 붙여서 고정시켰다.

포화도가 겨우 경고음이 울리지 않을 정로까지 올라갔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는 원장님의 권유에 그날 하루는 호흡기를 붙여놨다. 수유를 위해 호흡기를 떼면 여지없이 경고음이 울렸고 우는 아이가 안쓰럽고 초유가 나오지 않은 데이지 역시 신경이 날카로워지다 보니 모유는 더 나올 리 없었다. 계속 빈 젖만 힘겹게 빨고 있다 보니 아이는 지쳤고 간호사는 분유를 먹이면서 혼합수유를 권유했다.

엄마라면 당연히 모유를 먹이고 싶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래도 모유를 먹이는 게 더 좋다고 배워왔지만 이 상황에선 우리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 생각했고 전문가인 간호사, 원장님의 말에 고분고분 따라 행동했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아이의 산소포화도는 여전히 올라가지 않았고 호흡기를 꼽았음에도 포화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이의 기관지는 태어날 때부터 약하다고 들었다. 알고 있음에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3일째 되는 날에는 원장님이 이대로 유지하기보단 연계된 대형병원 신생아 집중 케어실로 보내 회복해야 할 단계일 것 같다며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올 것이 왔지만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조금 더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꼭 거기로 가야 하나?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나에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저 원장님의 말에 빠르게 수긍하고 행동하는 게 첫째님을 위한 길이라는 걸 알지만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워있는 데이지에게 상황을 알렸다. 가까운 대형병원으로 첫째님을 이송해야 한다고 알렸고 조금은 마음이 아프지만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면 회복 속도가 더 빠르니 일주일만 기다리자고 했다. 속상한 데이지는 그래도 아이를 위해 보내주기로 했고 대기하고 있는 구급차를 타고 이동했다. 가는 길은 그리 막히진 않았지만 사이렌 소리를 내면서 길을 비켜줄 것을 알렸다. 괜찮을 것이다 라는 마음이 사이렌 소리 때문에 깨졌다. 이 정도로 악화된 거였나? 좀 더 빨리 옮길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조금씩 밀려왔다. 간호사의 품에 들린 아이를 바라보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다행히 대형병원의 응급실 앞에 구급차가 멈췄고 간호사와 함께 병원 안으로 이동했다.

신생아 집중 케어실, 여긴 아이들을 위한 응급실 같은 곳이었다. 면회는 하루에 정해진 시간에만 가능했으며 30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첫째님을 인큐베이터에 넣는 것도 못 본 채 수속을 밟고선 홀로 있을 데이지가 걱정되어 빨리 병원으로 복귀했다. 면회는 다음날부터 당장 가능하니 우선 집으로 데이지와 함께 이동했다.

2월, 날씨가 추워서 산모는 찬바람을 쐬면 안 되기에 몸을 꽁꽁 싸매고 퇴원했다. 집에는 출산의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출발했던 상황들이 그대로 있었고 집에 돌아올 아이를 위해 비치된 용품들 역시 그대로였다.

다음날 아이를 위해 뭐라도 줘야 한다는 생각에 데이지는 어떡해서든 초유를 먹이려고 억지로 유축기를 통해 모유를 짜내 봤지만 나오지 않았다. 그게 속상해서 무리해서 유축기를 사용하다 보니 가슴만 부어오르고 통증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무리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어려웠기에 그만하자며 마음의 안정을 시켜주고 다음날 꼭 면회 가서 상태를 보자며 안타까운 마음을 달랬다.

다음날 면회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출산을 경험한 지 4일도 채 안됐고 산후풍 때문에 찬바람을 쐬지 말라던 어른들의 말보단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이 더 컸다. 온몸을 꽁꽁 싸맸지만 찬바람은 그 사이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조금 일찍 집중 케어실에 도착했는데 이미도 많은 부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모두가 일제히 위생 절차를 밟으며 내부로 이동했다. 누구 하나 큰소리 내지 않고, 줄 서지 않아도 알아서들 배려하고 먼저 입장하게끔 양보했다. 자식에 관한 일이다 보니 서로의 아픔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먼저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다른 이들에게 순서를 양보해줬다. 크나큰 아픔 앞에서도 욕심내지 않는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렇게 우리의 첫 면회시간에 아이를 보자마자 오히려 데이지는 덤덤했지만 난 그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내가, 우리가 널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줬는데 너무 아프게 했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렇게 아프게 태어날지 몰랐어!'

마음속으로만 말할 뿐 눈물만 흘리다 30분이 다 가버렸다. 황달기가 있어 자외선 치료를 해야 했고 입안에는 긴 튜브가 꼽혀 있었다. 자외선으로 인해 눈을 보호하기 위한 패치가 붙여있었고 정수리와 다리에는 링거가 꼽혀 있었다. 저 조그마한 아이에게 붙어있는 게 너무 많았다. 아이와 살을 맞대고 안아주고 사랑을 주며 모유수유를 해야 하는데 단지 30cm 거리를 두고 우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나약한 나 자신이 그날따라 더 싫었다.

눈물을 흘리다 면회 종료 시간을 듣고는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나와서 뒤돌아보니 아이에게 단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 바보같이 나 자신과 아이의 아픔에 대한 한탄만 했을 뿐 "힘내! 아빠 여기 있다! 사랑한다!"라는 응원의 목소리도, 아이의 이름조차도 부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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