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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리한 Nov 15. 2020

호네짜우~!

굳이 내 만족을 위해 한글자막을 선택한 최후

첫째님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청각 시간을 가졌다. 아무래도 첫째이다 보니, 장애를 갖고 있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들을 주고 싶었다. 모든 동요를 거의 외웠고 아이 앞에서 정말 열심히 못하는 노래를 불러줬다. 그게 과연 아이한테 도움이 됐을까, 아니면 아빠의 듣기 싫은 엉망진창 노래가 정신적 충격을 주지 않았을까?


하지만 둘째는 다르다. 대충대충 키웠다. 첫째님에게 모든 정성과 서비스가 들어가다 보니 상대적으로 둘째는 크게 신경 안 썼다. 그리고 둘째는 비장애이다 보니 혼자서, 알아서 잘한다. 자기 기분을 여과 없이 표현해서 때로는 짜증도 나지만 한편으로는 표현 없는 첫째님보다는 훠어~얼씬 더 키우는 게 수월했다.


그러니 둘째는 시청각 나이가 빨랐다. 시기와 단계에 맞는 캐릭터 순서를 훌쩍 건너뛴 채로 '콩순이'부터 시작해서 핑크퐁, 코코몽, 뽀로로 단계로 내려갔었다.


아내와 나는 디즈니 에니매이션을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줬었다. 둘째님이 정리정돈을 하게 만든 신데렐라는 칭찬한다. 하지만 겨울왕국은 저주한다. 1탄에서 나온 옷을 2탄에 입고 나와야지 왜 어째서 옷을 갈아입었는지 디즈니에 따지려고 했다.

'이러면 2탄에 나온 옷도 사야 하잖아!'


디즈니는 해외작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더빙'과 '한글자막'을 선택해야 했다. 각각 비용을 주고 따로 구매해야 하는 상술 때문에 좀 어처구니없었다.


난 한글자막을 선택했다. 아이의 영어교육을 위함은 아니었다. 단지 나의 재미와 만족 때문이었다. 더빙은 뭔가 장면과 상황에 어긋나는 차이가 있었다. 재치 있는 상황에는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아 와 닿지 않았고, 거친 표현에는 한없이 순한 말투가 나와서였다. 아이들이 보기 때문에 더빙을 선택해야 하지만 어른인 나에게는 너무 재미없었다.


한글자막을 선택하고 우린 '라푼젤'을 시청했다. 역시나 재밌었다. 첫째님은 그냥 티브이 앞에 나오는 빛이 좋아서 화면을 연신 쳐대다 보니 왼쪽 밑에 금이 갔고, 둘째는 금발의 공주가 나와서 좋아했다. 그놈의 또 공주.


어느 날 둘째가 갑자기 소리를 치면서 '호네짜우'라고 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아내한테 물어봤다.

"저거 뭐라고 해석하면 되는 거야?"


아내도 처음 듣는 말이라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렇게 둘째는 한동안 '호네짜우'라는 단어를 외쳤다. 장난치다가도 외쳤고, 자기 기분이 상할 때도 외쳤다.


아니 도대체 '호네짜우'가 뭐야? 하고 둘째한테 물어봤다.

하지만 둘째도 모른단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호네짜우'를 한동안 엄청 외치고 다녔다.


그렇게 '호네짜우'라는 단어가 잊힐 때쯤 아내가 나한테 말했다.

"여보, '호네짜우'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아"


나는 너무 궁금해서 얼른 물어봤다. 마치 다음 로또 당첨번호를 말해달라는 듯.


"그게, 내가 라푼젤을 너무 영어로 보여준 게 미안하고, 둘째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혼자서 하길래, 그건 아이가 심심하거나 대화가 부족할 때 나는 행동이라고 배워서 더빙을 다시 질렀거든"


"응? 그래? 잘했어. 그래서??"


라푼젤에서 주인공인 라푼젤이 유진(훗날 남편)과 함께 도둑놈 소굴의 주점에 갔을 때 도둑놈들이 유진을 붙잡고 신고하려고 할 때 라푼젤이 외쳤던 단어가 영어로는 "hold him down" 이였어.


"뭐?? 아... 그러네. 홀 힘다운.. 호네짜우"

아니 이게 그렇게 변화가 되는 건가 하고 한참을 웃었다. 웃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는 그 뜻도 모르고 자기의 생각이나 표현을 모두 '호네짜우'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린 그것도 모르고 한참 웃고 그 발음이 웃겨서 계속 시켰었다.


"아빠가... 미안해"


아이는 표현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어로 들리는 단어의 뜻도 모른 채, 그냥 그 상황에서 라푼젤이 외친 저 단어가 화낼 때인지, 기쁠 때인지, 슬픈 때인지, 어떤 감정의 표현인지 모르고 연신 외쳤던 것이다.


영어를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단지 내가 재밌게 보고 싶었는데 그게 둘째한테는 전혀 알 수 없는 표현의 단어가 되었던 것이 미안했다.


더빙은 재미없었고, 왜 더빙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를 알았다.

하나는 둘째 같은 유아에게 필요했고 또 하나는 첫째님 같은 장애인에게 필요했다.

시각 장애인에게는 자막은 필요 없다. 상황을 연상시키게 하는 소리와 배우들의 목소리가 필요한 것이다.

성우들이 나와서 더빙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아이와 장애인을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인터뷰를 듣고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첫째님의 다운증후군 장애에만 신경 썼지 타 장애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내 모습을 한번 더 생각하고 반성했다.


이젠 둘째도 호네짜우를 알았다. 그건 hold him down이라고 한다. 그럼 그 뜻은 뭐니?라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한다. 정말... 어디서부터 알려줘야 할지 난감한 상황들이 아직도 수두룩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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