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네이티브 스피커인데 뭘!
기가 막힌 사기를 당하고 난 후 시드니에서의 삶은 나에겐 인생의 나락을 보여줬다. 돈은 더 없었다. 아니 다 떨어졌다는 게 맞다. 하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 번뜩 차렸다. 내가 호주 오기 전에 정했던 3가지 목표를 뚜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지금은 3번째 목표인 나를 발견하는 시간인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힘든 시기에 냉정하게 내가 어떻게 해쳐나갈지,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한국으로 갈지를 지켜볼 수 있는 어찌 보면 더 없는 기회였다.
'여기서 무너지지 말자. 누구나 다 시련은 있잖아!'
실패는 없다. 실수만 있을 뿐 실패한 삶, 실패한 인생은 없었다. 다시 긍정 마인드가 저 멀리서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일일 노동자의 삶을 살다 보니 끼니 걱정이 가장 컸다.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마트 콜스에서 홈 브랜드 면과 치킨스톡 파우더를 샀다. 5개의 면과 치킨스톡이 들어있었고 1.5달러 밖에 안 했다. 원래 먹는 방법은 면을 삶고 물을 버린 다음 치킨스톡을 뿌려 비벼먹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그렇게 사치 부릴 여유는 없었다. 아침은 라면처럼 끓여서 면을 먹고 밥을 먹은 다음, 국물은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점심때 밥 말아 밥만 건져먹고 또 냉장고에 넣었다. 저녁때는 밥과 국물을 다 먹으면서 포만감을 느꼈다. 5일간 하루에 하나씩 먹으면서 돈을 모았고 토요일은 몸을 생각해 고기를 섭취해야 했다. 다행히 돼지 껍질을 큼지막하고 저렴하게 판매하기 때문에 구워서 간장에 아주 맛나게 찍어 먹고 일요일에는 한인교회에 가서 점심을 야무지게 먹으면서 버텼다. 그리고 주인장이 쌀은 언제나 먹을 수 있게 항상 비치해두었고 내 소식을 듣고선 당분간은 셰어 비용을 받지 않기로 해줬다. 아무리 같은 민족이 사기 친다지만 역시나 같은 민족이 그 아픔마저도 보듬어줄 수 있다. 아.... 정말 그럴 때마다 눈물 나게 고마운지, 또 감사했다.
밤에는 창문 밖으로 시드니 타워를 보면서 내 인생을 잠시 한탄하다가 다시금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잠을 청했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붙잡고 할 수 없었다. 아직은 동양인이, 그것도 영어가 서툰 동양인에게 친절하게 영어를 알려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친절하게 다가온다면 그때 그 펍의 아찔한 상황들이 문득 생각나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었다.
'아참 여기도 RSL클럽이 있잖아'
얼른 지도를 펼쳤다. 가까운 곳에 있었고 퀸즐랜드의 그 클럽을 상상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향했다. 근데 도착하고 나서 보니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는데 퀸즐랜드의 그 클럽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저 겜블 머신과 작은 바, 포커 테이블이 들어갈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다들 겜블 머신의 레버만 당기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
내가 아는 그 재밌는 클럽 분위기와 그 감성들은 여기서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고 영어를 배우기는 틀렸다 판단했다. 아쉽지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또 길을 걷다 보니 한 홈리스를 보게 되었다. 비교적 다른 홈리스보다는 깔끔한 편이었다.
"가만있어보자. 솔직히 저 사람도 네이티브 스피커 아냐?"
그 홈리스에게 다가갔다.
그분은 그저 다른 사람처럼 지나가는 행인인 줄 알았지만 내가 다가가서 "excuse me" 하면서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았다.
"나 영어 배우고 싶어서 한국에서 왔어. 좀 도와줄래?"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역시 맨입으로는 안될 것 같았다.
보틀 샵에 가서 큰 맘먹고 맥주 1병을 샀다. 1병에 2달러로 저렴하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시 그 홈리스에게 가서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홈리스는 나보다 술을 더 반기면서 당연히 콜을 외쳤다.
냄새가 좀 심했지만 그래도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안타깝게도 그분은 치아가 몇 개 없어서 그런지 영화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 음성변조 목소리처럼 나왔다. 정말 한 개도 들리지 않았다. 어떡해서든 들으려 했지만 도저히 안돼서 알아들은 척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마구마구 내뱉었다.
문법 따윈 필요 없었다. 난 단지 내가 외국인에게 말을 하는 것이 중요했고, 영어를 못한다는 두려움을 깨버려야 했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 프리토킹을 하다 보니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까짓 거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영어단어면 어때? 내뱉을 용기만 있으면 되는 거 아냐?"
더 있고 싶었지만 미안하게도 내 후각은 그리 예민한 편은 아닌데도 더 이상 그 냄새를 적응할 수 없어서 일어나야 했다.
인사를 하고 내 갈길을 갔다. 딱 1번밖에 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때 비로소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좌절을 겪어도 나름 살려고 발버둥은 치는구나'
'내가 세운 목표가 나한테 주는 힘은 생각보다 강하구나'
확실하게 두 가지는 알았다. 쉽게 좌절하지 않고 목표를 확고히 하는 것,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전진하는 그 모습을 알게 되었다.
시드니가 또 나한테 이런 걸 안겨주었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 확고한 목표가 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시드니에서는 어쩌면 내 목표가 정말 더 확고해졌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남은 호주 생활을 정말 열심히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