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4 : 메모
메모하며 대화하는 것의 효율은
상상 이상이다.
신체의 안과 밖, 역동의 점과 선을 넘나드는 탁월함이 있다.
나는 포스트잇과 사인펜만 있으면 어디서든 무슨 대화든 진행이 가능하다(!).
그 정도로 진행자 서유에게 중요하고 유용한 도구다.
'메모지와 필기구', '포스트잇과 네임펜'은
다르다!
그래서 나는 사전에
정방형 기본 사이즈 3~4 컬러 오리지널 포스트잇 넉넉히 / 중간글씨용 네임펜
으로 콕 집어서 요청한다.
얇은 볼펜은 대화용 메모에 적합하지 않다.
나는 보통 이렇게 진행한다.
"키워드 중심으로, 큼직하게 써주세요."
이유는 단순하다.
보여야, 공유하기 좋기 때문이다.
* * *
포스트잇은 원래 제품명이자 브랜드다. 접착식 메모지의 대명사가 되긴 했지만.
그래서 포스트잇을 요청하면 다른 브랜드 제품이 준비돼있을 때도 있다.
수많은 메모지를 써본 결과,
접착력이나, 작성 후 뗐을 때 접착 부분의 말림 정도(!)라던지, 뗐다 붙였다 반복했을 때 얼마나 버티는지 등등 모든 면에서 오리지널 포스트잇이 제일 낫다.
내가 준비할 때는 무조건 오리지널이다.
기본 정방형 사이즈는 개인이 메모하기에도 적당한 사이즈고,
모아 붙이면서 카테고라이징할 때도 나열하기에 좋다.
컬러의 경우, 정리 구조를 시각화하는 데 특히 유용하다.
사용 방식은 대화 설계에 따라 다르다.
기본 컬러만 무난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단계별로 진행할 때는 순서마다 컬러를 바꾼다.
팀별로 다른 컬러를 나눠주고 시작할 때도 있고,
주제별로 컬러를 지정해서 색깔별로 모아 보기 좋게 진행할 때도 있다.
"오늘 어땠는지 소감 적어주세요."
후기를 받을 때는 다양한 컬러에 적으면 좋다. 모아놓고 봤을 때
다양한 색깔의 포스트잇이 여러 글씨체로 함께 있는 걸 보면 행복하다.
필기구의 경우,
플러스펜이나, 일반 사인펜처럼 도로록 굴러가버리거나,
모나미 볼펜처럼 가볍거나, 똑닥거리는 볼펜을 보면
나는 동공지진이 된다.
그래서 사전 협의가 가능한 현장에는 중간글씨용 네임펜을 최우선으로 요청한다.
(검정 파랑이면 되지만, 혹시 컬러세트가 놓여있으면,
노란색과 황토색 등 밝아서 잘 안 보이는 색은 따로 빼둔다.)
굵은 펜을 선호하는 이유는 '공유하는 대화'를 위해서다.
포스트잇에 키워드 위주로 큼직하게 쓰면,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며 대화하기 좋다.
아이컨택이 어색한 초입부에 시각적으로 기댈 장치가 되기도 하고,
키워드가 대화의 중심을 잡아준다.
* * *
사람들이 대화하는 동안
나도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나의 키워드를 보태기도 한다.
테이블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나는 키워드가 있으면 포스트잇에 적어서 붙인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주머니가 있는 옷을 입고 진행한다.
내 주머니에는 포스트잇과 사인펜이 있다.
누가 작성한 메모인지 확인이 필요할 때는
작성자 표시를 부탁한다.
포스트잇 구석에 이름을 적거나, 나만 아는 표식을 남겨도 좋다.
여러 포스트잇을 모아서 함께 살펴보다가,
"오, 이 키워드 누가 쓰셨나요? 이야기 조금 더 들어보고 싶네요."
라며 마이크를 건넬 때도 있다.
메모로 드러나지 않은 맥락을 공유하면서 대화가 더 풍성해지기도 한다.
* * *
나는 몸의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것보다는,
손을 써서 꺼내는 걸 더 선호한다.
실제로도 손과 팔의 근육을 움직이며 메모를 할 때
뇌에서는 기억, 인식, 판단을 담당하는 여러 영역이 동시에 활성화된다.
우리는 흔히 '생각을 정리한 다음 쓰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 순간의 역동은 '상호작용'에 가깝다.
'쓰는 행위' 자체가 감각운동 시스템과 고차원 인지 시스템을 동시에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손으로 메모를 하는 행위는,
단순 출력이 아니라 인지 과정을 자극하고 생각을 구체화하도록 유도하는 움직임이다.
이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썰이 길었다.
서두에 적은
'신체의 안과 밖, 역동의 점과 선을 넘나드는 탁월함'을 좀 더 풀어보자면,
시신경과 손과 팔이 작동해서 뇌에 영향을 미치는 것,
내 안에서 나의 언어나 감정을 정리하는 것,
그것을 메모라는 형태로 꺼내고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과 있을 때에는 신경이 온통 밖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글씨를 쓰는 순간만큼은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포스트잇이 일종의 기댈 곳이 되는 셈이다.
정리된 생각의 끝에 나온 키워드는
대화의 효율을 높여준다.
잠깐의 작성시간을 갖고 공유하는 것과,
중구난방 일단 대화를 시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차이가 크다.
* * *
보통 메모에 대해 이야기하면 '기록'의 의미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대화가 이뤄질 때의 메모는,
공유와 연결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가 흐릿해지지 않으면서 낯선 타인과 연결되는 것,
나는 이 순간을 만들어낼 때 희열을 느낀다.
요즘은 친환경 이슈로 메모지도 안 쓰는 쪽으로도 많이들 운영하지만,
내가 절대 포스트잇만큼은 포기 못하는 이유가 이런 부분이다.
어떤 모임이든, 순간순간에 잘 머무는 것.
그 도구로 포스트잇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대AI 시대(!)에 다른 대체 도구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아날로그 감각을 사랑하는 나는 당분간은 더 포스트잇을 사용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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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에 대한 설계 팁은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
1) <나는 왜 이름표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1 : 이름표
2) <나는 왜 의자 간격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2 : 공간
3) <나는 왜 브금BGM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3 : 배경음악
4) <나는 왜 포스트잇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4 : 메모 (현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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