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5 : 사전 설문
모임은 이벤트 당일에 시작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참석하겠다'고 응답한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전 설문에 집착한다.
단순한 명단 작업이 아니라,
설문을 통해 데이터를 얻고 그를 바탕으로
모임의 분위기, 역동의 흐름을 디자인한다.
이름, 연락처, 참석여부만 묻는 사전 설문은,
응답자로 하여금 별다른 상상 없이 그 자리에 오게 한다.
그건 너무 아쉽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통해 그 자리를 미리 그려보게 하고 싶다.
"요즘 내가 관심있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가요?"
"최근 나를 표현하는 키워드는?"
"이 모임에서 기대하는 장면은 어떤 건가요?"
이런 질문에 응답하는 동안,
응답자는 자연스럽게 상상한다.
그 자리에 앉아 말을 꺼내고 있는 나,
누군가와 대화하는 나,
공간에 머무는 나.
그 상상은 그냥 이미지가 아니다.
모임에 대한 기대와 마음의 준비다.
* * *
"누구든 오세요"라는 무드를 만들고 싶다면,
간단한 정보만 입력해도 신청 가능한 폼이면 된다.
내가 직접 운영하는 모임의 경우, 필수 응답 질문이 많다.
그 자체가 일종의 '허들'이기도 하다.
나는 그 허들을 넘어와주는 분들과 정성껏 만나고 싶다.
설문 자체를 아무렇게나 뿌리지 않고,
꼭 초대하고 싶은 이에게 직접 안부를 나누며 건넨다.
"그날 시간 괜찮으세요? 제 파티에 와보실래요?"
내가 보내고 싶은 건 링크만이 아니다. 초대하는 마음도
부드럽게 얹어서 초대장을 내밀고 싶다.
* * *
나는 설문을 모종의 예고편처럼 활용한다.
질문을 어떤 내용으로 구성하는가,는 1차적인 얘기.
어떤 말투와 농도로 디자인할지,
선택지를 유머러스하게 담아볼지,
배경 이미지를 어떤 사진이나 컬러를 쓸지 등.
나는 이런 디테일들을 결정하는 데 공을 들인다.
설문만 봐도, 어떤 분위기의 모임인지 느껴졌으면 좋겠다.
질문이 딱딱하면 모임도 딱딱할 거 같다.
문장이 다정하거나 재밌으면, 그 분위기가 미리 전달된다.
사람들이 응답하면서 '이런 자리겠구나' 상상하길 바란다.
그 상상은 모종의 리허설이 된다.
* * *
사전 설문은, 내가 먼저 말을 거는 시작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응답자가 읽었을 때 부드럽게 읽히길,
다정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상상해주길 바라며
문구 하나 말투 하나도 수십 번 다듬는다.
사례 1 : 난장의 허들
'난장'은 코로나 이전 내가 운영했었던 예술인 네트워킹 파티다.
이 모임은 의도적으로 다소 폐쇄적인 구조였다.
불특정 다수가 아닌, 서로를 소개하며 정성스럽게 초대로 들어오는 구조.
그래서 설문에도 허들을 뒀다.
질문도 많고, 모든 문항이 필수응답이었다.
설문은 참여신청서이자 사전 동의서였고, 난장은 이런 곳임을 알려주는 예고편이었다.
호스트인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설문이 가더라도,
모든 질문에 성의있게 응답하며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면,
누구라도 환영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누구의 초대로 오시나요?" "아티스트라면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나는 아티스트가 아니에요'라고 한다면, 어떤 예술을 좋아하시나요?" "요즘 당신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요즘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나요? 함께 얘기 나누다 보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9월 난장에 기대하는 바를 모두 체크해주세요." ...
이 질문들도 일부만 적어보았다. 실제 설문은 훨씬 더 다채롭고,
응답자의 언어를 유도하는 구조로 짜여 있었다.
어떤 문항은 서술형으로, 어떤 문항은 선택지를 다양하게 구성하면서,
설문에서부터 '관여도'를 높이기 위한
아주 의도적인 디자인을 했다.
보통은 설문 자체를 홍보용으로도 많이 쓰지만,
당시 나는 오직 '말 걸기'를 위한 설문으로 썼다.
설문에 성의있게 응답한 소님들은,
'기꺼이 함께 즐길' 마음의 준비를 하고 파티에 와주었다.
사실 나는 예전에 여론조사 회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질문의 순서, 단어 선택, 선택지의 배열 등이
응답자와 응답 데이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안다.
그래서 단순히 질문을 만들고 나열하는 대신,
설문이 모임의 기획 의도에 맞게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디자인하려고 한다.
지금도 설문을 만들 때면, 종종 난장 시절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이 올지, 어떤 만남이 이뤄질지,
기대와 궁금함으로 가득했던 그때의 마음.
사례 2 : 별별극장의 말랑한 설문
과천의 작은 마을극장이 있었다. 별별극장.
이름처럼 귀엽고 다정한 공간이었다.
극장의 친구지만
한편으론 외부 진행자로서, 나를 모르는 참여자들을 위해
어떤 말 걸기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설문의 시작을 이렇게 써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의 만남을 도와드릴 과천 바깥사람� 서유라고 해요.
몇 개의 질문에 응답해주시면 야무진 진행으로 보답하겠사옵니다.
솔직한 응답은 준비에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설문에서부터 '사람'을 느낄 수 있는 방식,
서유라는 진행자의 페르소나를 드러내는 디자인.
이 인사로 인해 설문이 '대화'처럼 느껴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요즘 내가 보는 '우리 동네'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내가 원하는 '우리 동네'를 상상해볼까요?" "공감가는 항목에 모두 체크해주세요." "우리가 모여서 '잘 몰랐던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 얘기는 꼭 나누고 싶어요." "이번 만남에서 기대하는 점 모두 체크해주세요." ...
응답자는 직접 드러나지 않도록, 내용을 다듬어서 현장에 게시한다.
사람들이 그래프를 보며 자연스럽게 대화 나누도록.
"나도 이거 체크했는데!"
"이거 공감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네~"
설문에 답할 때는 점 단위의 개별적 응답이지만,
현장에서 다시 선-면 단위로 만나게 하는 의도이다.
* * *
설문 폼은 그 자체로 일종의 홍보 도구다.
자세한 설명과 이미지는 폼 안에 다 담고,
링크 하나로 손쉽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
내 이름을 담아 내보내는 설문은,
그냥 나라고 생각한다.
모임 훨씬 전부터 진행자와 라포를 쌓는 첫 순간.
진행자는 어떤 사람인지,
모임의 분위기가 어떨지,
어떤 참여자들이 올 건지,
나는 거기서 어떤 이야기를 해볼지, ...
내가 사전 설문에 대해 이렇게까지 생각이 많은 이유는,
참여자들이 최대한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끼며 모임에 오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모임 후에는 반드시 사후 설문도 진행한다(!)
참여자들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듣는 것 또한 소중하니까..*
사족 : 아주 거창한 설문인터뷰를 구성한 적도 있다. 이것은 나중에 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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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에 대한 설계 팁은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
1) <나는 왜 이름표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1 : 이름표
2) <나는 왜 의자 간격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2 : 공간
3) <나는 왜 브금BGM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3 : 배경음악
4) <나는 왜 포스트잇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4 : 메모
5) <나는 왜 사전 설문에 집착하는가> - 진행자의 집착 시리즈 05 : 사전 설문 (현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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