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 선 Dec 07. 2023

불안형이였던 내가 회피형이 돼버렸네?

내가 존재하는것에 대한 죄책감

우리는,

나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느꼈었던 내 현실이 무엇인지 직시해야 한다.

나를 위해 해야 한다.


나는 불안정한 환경에서 불변성을 꿈꾸며 사랑 - 소울메이트 - 에 대한 환상을 키워왔다.

그리고 세상은 불공평하게 나에게 함께 할 미래가 없는 사람들을 준다고 생각했다.


피해의식에 갇혀있었을 땐 "나는 아픈 사랑만 할 운명이라서"라고 생각했고,

나를 돌아보고 내 관점을 바꾸고 나선 "우주가 내가 사랑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관점을 인지할 수 있도록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관점은 아직 굳건히 믿는다.

하지만 새로운 관점이 더해졌다. 이런 인연들을 정해온 것엔 나의 무의식의 자발적인 선택이 생각보다 깊이 관여됐단 것이다. 실패하는 사랑만이 나에게 쥐어진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선택한 것 같다.


난 내가 공포회피, 즉 혼란형 애착유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모든 불안정한 애착유형들은 깊은 곳엔 서로 별반 차이가 없다고 믿는다. 회피형이 사랑을 피하는 것은 언젠가 사랑하던 누군가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서인 것처럼, 불안애착형 역시 깊은 회피성향이 있다. 난 대부분의 시간 매우 매우 불안한 혼란형이다. 사랑이란 감정의 극초반에는 아쉬울 게 없으니 안정형 같다가 풋풋한 설렘을 지나 더 진한감정으로 무르익어가면 되게 안절부절못하는 불안애착유형이 된다. 그렇다가 관계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회피형이랑 불안형이 왔다 갔다 공존한다.


내 옆에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줄 불변성을 꿈꿔왔고, 결혼할 만큼 나에게 안정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꿈꿨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 좀 더 솔직하게 정말 그걸 원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이 물음에 솔직한 대답은 지금에서야 할 수밖에 없었다.

전엔 "난 사랑받지 못해,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라는 결핍의 블랙홀이 너무 커서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 못 할 정도로 그저 닥치는 대로 애정을 갈구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 구멍을 어느 정도 메꾼 후에야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그 순간이 나에겐 현재 최근이다.


정말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내가 날 사랑하게 됨으로써) 이해하니 애정결핍의 소용돌이가 멈추었고, 마음이 잠잠해지니까 내 바램이 좀 더 명확하게 들렸다.

난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많고, 오롯이 나를 돌볼 수 있는 기회를 바라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질지 제한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인 상태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고 싶다.


물론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다고 그걸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커리어와 인간관계, 가정 그리고 나 자신의 밸런스를 찾는 사람들은 분명 많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그렇게 바라고 바랬던 영원한 사랑과 안정적인 가정이 막상 지금 내 손에 쥐어진다면, 현재로선 "나의"삶의 한계를 두는 것같이 느껴졌다. 갑갑해졌다.  

전형적인 회피형의 마음 - 뭘까? 난 안정적인 애착유형엔 못 다다르고 결국 불안의 반대편인 회피가 돼버린 것일까?


생각만 해도 갑갑한 지금 이 감정을 내가 느낀 적 있는지 오래 고민했다.

이 답답함을 일부러 초대하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어디서 봤더라?


내 안의 죄책감과 닮아있다.

난 나의 엄마를 정말 우러러본다. 단언컨대 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녀는 인간으로서 향기롭고, 명석하고, 멋지다.

엄마는 25살에 나를 낳았다. 아빠는 당시 27살 대학원생.

두 분이서 아무것도 없을 시절 함께 날 키워낸 시간과 몇십 년의 사랑은 내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사랑이고 동반자의 개념이다. 하지만 엄마는 내가 생겨서 어린 나이에 커리어가 단절됐다. 지금 내 나이가 그녀가 나를 낳은 나이인걸 생각하면 - 아득하다. (참고로 난 속도위반 베이비가 아니다..ㅎ)


난 언제나 엄마의 빛이 멋졌고, 그 빛이 조금 더 넓고 자유롭게 발광했으면 했었다. 7살 때 본, 커튼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받으며 싸이월드 홈피의 샹송을 부르고 춤추며 집안일하는 엄마부터, 11살부터 본 아빠와의 관계가 잠시 무너짐과 동시에 함께 사그라든 그녀 빛까지 봐오며 느낀 것은 죄책감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자유로웠을까.

아빠는 가정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당연히 난 우리 엄마아빠의 결혼기념물 1호로써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보석이고 선물이다. 이걸 아주 잘 안다. 동시에 난 내 존재에 대한 죄책감을 가져왔다. 둘 다 사실이어도 괜찮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내가 새롭게 느끼게 된 이 회피성 바첼러 같은 아내/엄마란 역할의 의무감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아마 여기서 비롯된걸 것이다.


1. 난 이 갑갑함이 내 현실이길 바라지 않고,

2. 혹시라도 내 아이가 자신을 나의 앞길을 막은 무언가라고 느낄 수 있는 기회조차 싹이 없었으면 하고,

3. 어렵게 찾아낸 나 자신과 내 가능성이 너무 애틋해졌고,

4. 나의 존재에 대한 죄책감을 아직 완벽히 가다듬지 못했으니까.


어이쿠 회피형이 돼버렸네! 치부하기보단

이제야 나를 "외로움과 자괴감에서 구해줄 왕자님, 내 결핍을 채울 소울메이트 어딨나요"보단

그냥 지금 당장 내가 좋아하는 사람, 공간, 일, 행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뿌듯했다.

사랑하려고 사랑 할 수 있을 거 같다.

언제나 역류하는 하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나를 거스르고 내 감정을 몰아붙이고 사람들을 잡아당기거나 밀쳐내면서 살아온 나에게 지금의 초연함(?)은 개인적으로 매우 매우 환영하는 마음가짐이다.

평화롭고 잔잔하다.


글을 쓸 때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언제나 (내 딴엔) 결론을 꼭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내 사랑에 대한 진척은 현재로선 여기까지다.

굳이 결론을 내리자면:

생각을 하는 프로세스 자체를 봐달라?

이게 맞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모든 생각을 하면서 전과 같은 자괴감 자책, 자기혐오는 분명 느끼지 않았고, 내가 예전처럼 나 자신에게서 도망쳤다면 분명 이 명확함과 나에 대한 이해는 이뤄지지 않았을 테니까.



전에 만들어본 gif 왜 찰떡이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