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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May 11. 2023

반말 VS 존댓말 번뇌에 대한 고백

육아에세이 │아이를 믿고 기다리자!

"내가 순간이동 하는 거 보여줄게."

"순간이동? 어떻게 하는 거야?"

"어~ 이건 손가락을 이렇게 해서 여기를 누르면 돼."

"아 이렇게 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잘 봐봐"


얼핏 들으면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인 듯 하지만, 아이와 어른의 대화이다. 그렇다 우리 집 6살 아들은 아직 존댓말을 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 엄마 아빠, 이모, 지나가는 어르신 등 예외가 없다.


어떤 깊은 철학적인 의미로 존댓말을 안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3살 무렵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와 짝꿍은 아이가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모두가 존댓말을 쓰며 아이도 존댓말을 제법 잘 사용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가 4살에 숲유치원으로 기관을 옮기면서 반말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안유치원이다 보니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중시하면서 이곳 아이들은 선생님과 자연스럽게 반말로 소통을 한다. 아이들 전체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가정에서 따로 지도를 받은 아이들은 선생님들께 존댓말을 잘 사용하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기관 선생님들과 집에서 부모의 태도가 어느 정도 일치해야 아이가 혼동이 없을 것 같아서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익히고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게 4살 무렵이니 2년 정도 지난 셈이다. 마음을 먹긴 했지만 다른 어른들과 마주하는 상황에서는 어김없이 내 마음 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아 가운데 하나가 불쑥 뛰쳐나와 불뭉치를 던지며 나를 괴롭히곤 한다.


엄마는 선수 치기 대장  


5살까지는 그래도 나 스스로가 반말로 대화하는 것 자체를 귀엽게 봐주었다. 근데 6살이 되고 키도 훌쩍 크고 했는데도 아직까지 존댓말을 하기를 어색해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어딘가 불편해진다. 그래서 나는 어른들을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선수 치기 대장이 된다.


아이가 한마디 말을 시작하면 얼른 "어우, 아이 유치원은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편하게 반말로 이야기를 하는 곳이라서 아직 존댓말을 잘 못해요."라고 말이다. 나는 늘 아이 편을 든답시고 이런 말을 종종 해왔는데, 이 말에는 '원래는 존댓말을 하는 것이 맞는 건데요. 우리 아이는 유치원 상황 때문에 존댓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해 좀 해주세요.'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나는 아이가 꼭 해야 하는 것임에도 유치원 핑계를 대며 연습시키지 않은 엄마가 된 것을 자백하는 것은 물론이고, 존댓말을 하지 않는 것을 약간 못마땅하게 여기는 엄마의 느낌을 아이에게도 전달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를 나름 변호해 준다고 하는 나의 말들이 너를 '존댓말도 못하는 아이'로 만들어 버렸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늘 엄마처럼 눈치 많이 보는 사람으로 자라지 말아라. 당당하게 너의 생각을 펼치면서 살라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는 매번 남이 내 아이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존댓말은 왜 해야 하는 걸까?


한 동안 존댓말에 관한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반말하는 사람과 존댓말 하는 사람을 꼭 구분 지어야 하는 걸까? 우리말은 왜 이리 존칭어가 발전한 것일까? 아무리 유교문화로 예의를 중요시했다고 한들 유교문화의 뿌리 국가인 중국에서도 모두 你好(니하오)라고 짧게 인사한다. 특별한 존칭어도 몇 개 없다. 아이들이 어른들한테 하는 말에는 왜 추가로 '요'자를 더 붙여야 하고, 이제 막 말을 시작하는 아이한테도 왜 '안녕'이란 두 글자가 아닌 '안녕하세요'의 무려 5글자를 알려줘야 하는 걸까?


내 아이가 존댓말을 자연스럽게 잘 사용하는 아이였다면 내가 이런 생각들을 했을 리 만무하다. 사실 나는 아이가 집에서 엄마 아빠에게 반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보거나 예의가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건 아이 자체의 고민이 아니라 나의 고민이었다. 나는 다른 어른들이 내 아이를 예의 없는 아이로 바라볼까 봐 그 시선이 불편하고 불안했던 것이다. 내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핑계를 대면서까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초라해지는 순간이다.


내 아이를 믿고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 되어보자


'언제까지 이 아이가 어른들과 반말로만 소통을 하진 않겠지'하는 먼 미래상황에 대한 안도감이 엄마인 나를 조금은 위로해 주었다. 설령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홍반장처럼 자기만의 멋진 철학을 갖고 존댓말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그럼 그건 더욱 멋진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허황된 상상도 하며 존댓말에 대한 마음을 오늘도 내려놓아 본다.


아이가 대화할 때 중요한 것은 존댓말이란 '포장(형식)'이 아니라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감정이 담긴 말, 진심 어린 내용''우호적인 태도'라고 말이다.


내가 아이의 반말을 잘 지켜본 결과, 반말의 장점 발견하였다.  건 아이도 좋고 어른에게도 좋은 점인 것 같다. 모국어는 5살 중반 즈음에 완성이 된다는데 존댓말을 너무나 강요하면 어른과 말을 할 때 자기의 말 보다 존댓말을 신경 쓰면서 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반말로 편하게 이야기를 하면 아이가 하고자 하는 말들을 비교적 막힘없이 술술 할 수 있고, 아이가 하기 어려워하는 감정표현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아웃풋되는 순간과 마주하기도 한다. 즉, 나는 반말의 장점은 한마디로 '어렵지 않은 자기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내 친한 친구가 멀지 않은 곳에 산다. 내 아이와 이 친구가 만나면 둘은 친구처럼 종알종알 한참을 떠든다. 이모를 만나면 뭔가 부담이 없어 보이면서 쫑알쫑알 미주알고주알 마음을 다 털어낸다. 내 친구는 본래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이 없다. 근데 친조카도 아닌 친구의 아이를 잘 챙겨주고 마음 써주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이 친구는 '태양이는 내 친구 같아, 아니 우린 진짜 친구야'라고 말한다. 늘 반말로 이야기하는 아이를 돌봄이 필요한 아랫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 대해주는 내 친구가 너무 고맙고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가끔 내가 잠깐 없을 때 이모에게 속마음을 전하기도 하니, 반말의 장점을 이럴 때도 느끼곤 한다. 비록 말은 반말이지만 진심으로 이모를 대하고 속마음을 이모에게 털어놓으며 이야기도 하면서 그들은 진짜 친구가 된 것이다.


아이는 시시콜콜한 유치원 일상 이야기부터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대화형식으로 연기하듯 생생하게 들려주는 편이다. 대화하며 느낀 감정들도 서툴지만 표현을 하는데 나는 여기에 '반말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얼마 전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아이가 상황을 재연하는 재연상황극, 역할놀이를 좋아해서 자주 하는 편인데 필요한 상황이면 아이는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존댓말을 너무나 태연스럽게 잘하고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봐서 머리로는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몰라서 안 하는 게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장 아이에게 '너 존댓말 잘하네, 어른들 만나면 이렇게 해봐'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다. 어른에게 말할 때는 '요'를 붙이는 건 알겠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마음속에서 스스로 그 당위성을 찾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련다.


나는 내 아이를 믿기로 했다.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은 생기면 존댓말도 자연스럽게 하겠지. 엄마인 나부터 존경심이 우러나올 수 있는 든든한 어른이 되어주기로 약속해 본다.


어른을 향한 아이의 반말은 '로켓'과 같은 존재다. 로켓은 우주선이 우주를 항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 이면서, 언젠가 우주선과 반드시 분리 된다. 어른과 진정한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반말로 충분히 말해보는 연습과정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로켓처럼 분리되어 사라질 것이니 존댓말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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