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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토리 Sep 01. 2023

내 인생 순서는 '내가' 정합니다.

요새 메이크업을 할 때 기초화장 후 가볍게 톤업 크림(파운데이션보다는 질감이 가볍고 메이크업 베이스보다는 다소 커버력이 좋은)을 바른다. 그 이후 눈화장과 립스틱을 바르고 마지막으로 얼굴 전체에 파우더를 바른다. 대부분 메이크업 순서는 눈화장과 립스틱이 마지막 단계인데 나는 순서를 늘 뒤바꿔서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게다가 멀쩡한 화장대가 제구실을 못하는 바람에 눈화장과 립스틱은 안방 화장실 한켠에 두고 있다.


즉 톤업 크림까지만 바르고 안방 화장실까지 와서 눈화장을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파우더를 꺼내 뽀송뽀송하게 피부화장을 마무리한다. 뭐든 동선을 중요시하는 내가 왜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스스로가 의문스러워졌다. 내 기준에 메이크업의 마무리는 피부가 뽀송해 보이게 짜잔~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의식도 못하고 있던 내 행동을 돌아보니 이상하기도 했지만 또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늘 이렇게 화장해도 전혀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워 보였으니까.   


요리할 때도 비슷한 경험이 많다. 백종원 님 레시피는 초간단하면서도 한 두 개씩 꿀팁을 알려주셔서 종종 보는 편이다. 그런데 레시피는 참고하되 모든 단계를 체계적으로 따라 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걸 잘 못한다. 계량하고 순서를 지키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 느낌이 드는 걸까. 하나하나 순서지 켜 용량 체크해서 계량하다 보면 지쳐서 요리를 영영 포기할 것만 같아서 못 하겠다.


예를 들면 오징어 볶음의 경우, 오징어를 파기름에 볶다가 양념 중 설탕을 가장 먼저 넣으라고 알려준다. 나름 과학적 근거도 있다. 설탕 입자가 가장 작아기 때문에 먼저 넣어야 겉돌지 않고 감칠맛도 난다고 했다. '오 그렇구나' 하면서 나는 역시나 오징어를 볶다가 한꺼번에 올리고당, 고춧가루, 간장, 후추, 매실액, 다진 마늘을 한꺼번에 양념장으로 휘휘 저어 만든 다음 때려 붓는다. 심지어 설탕을 넣으라고 했는데 올리고당으로 퉁쳐버린다. 레시피는 왜 본거지? 아들보고 맨날 청개구리라며 체념하는데 역시 애미의 청개구리 기질을 닮은 것이 분명하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먼저 설탕을 넣으나 올리고당으로 퉁쳐서 양념을 섞어 때려붓나 내 입에는 모두 맛있다. 그저 맛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나의 이런 청개구리 습성은 내 인생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왔다. 중국어를 전공한 후 커리어우먼인 시절에는 중국어 번역과 중국 진출 기업 컨설팅일을 꽤 오래 했다. 결혼 후 회사 다닐 때만 해도 직장 상사가 "애 낳고도 애 업고서 집에서도 일하면 되지."라고 할 정도로 인정도 받았었고, 아이를 낳고도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 아니 당연히 해야만 하는 걸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업무 특성상 서류와 보고서 작업이 많았던지라 재택근무도 가능하니 나에게 하신 말씀일 것이다. 아이가 네 살이 지나는 무렵에는 주변에서 일 좀 해야지? 일은 안 해?라는 말을 꽤 여러 번 들었다. 다니던 회사는 결국 그만두었지만 문서번역 같은 소소한 일도 재택근무로 하는 것 어떠냐고 제의도 몇 번 들어왔다. 아이를 키우면서 재택근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좋은 기회인 것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매번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 당시 짝꿍 지인인 한 사장님과 부부동반으로 식사할 자리가 생겼었다. 아내분은 아이들 모두 장성할 때까지 전업주부로 사시다가 그 이후 본격적으로 본인의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씀해 주셨다. "아이 적당히 키워놓고 일해도 전혀 늦지 않아요. 지금은 아이 잘 키우는데 집중해 봐요. 아이를 무탈하게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더라고!" 그렇다고 아이를 키우는 시기에 마냥 룰루랄라 놀기만 하신 건 아니었다. 원하는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도 진학해서 공부를 하며 나름의 준비를 하셨다고 한다. 물론 남편분이 가정경제를 홀로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유능하니까 가능했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평균 수명이 늘어난 지금 시대에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건네주시는 그 말씀에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정 같은 것이 샘솟게 되었다.   


전업 주부로 살다 보면 불쑥불쑥 일을 제대로 다시 해보고 싶은 욕구가 떠오른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만 하고 약간 잘하는 일만 찾아 해오던 나로서는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스스로에 대한 반항심이랄까. 왠지 모르게 이제는 용기 비슷한 무언가가 생기고 있음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청개구리의 내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늘 용기가 없어 못나 보이고 한심하게만 느껴졌던 나이거늘. 내가 점점 좋아진다는 것은 스스로 열정을 쏟을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의미와도 같다.


생각이 많은 'I'형 인간인지라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을 붙들고 싶어 블로그를 시작했고, 글을 좀 끄적이다 보니 어느새 브런치 작가도 되어 있었다. 내 주변인은 나를 전업주부로만 여길것이고, '작가'라고 하기엔 뽀시래기이지만 용기를 내어 '작가'라는 직업을 내 이름 옆에 은근슬쩍 갖다 대 본다. 작가라서 쓰는 게 아니라 그저 글을 자주 끄적이고 있으니 작가라고 해도 되는 것 아닙니꽈! (이렇게 쓰면서도 혹여나 지인들이 보면 날 뭐라 생각할까 이불킥하는 소심한 아줌마이다 하하)


글 쓰는 일이 즐겁고 좋아하는 일이었다는 걸 마흔에 도달해 알게 된 것이 어쩌면 다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쉰 살에 알게 된 것보다 낫지 않은가? 어느 분야나 최소 10년은 해봐야 전문가라는 소리를 들을터. 지금부터 한다 해도 해도 나는 고작 50세 밖엔 되지 않는다. 남들이 정해놓은 인생 순서에 연연하지 말고 내가 정하는 순서대로 내 인생을 살기로 했다.


주변에 훌륭한 누군가가 나이대에 맞는 인생 순서가 있듯 불쑥 끼어드는 말에 절대 현혹되지 말길. 각자의 인생에서 순서는 뒤바뀌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고. 애 어느 정도 키워놓고도 복직을 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고, 내 즐거움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는 조금은 이기적인 아내가 되어도 괜찮다고. 10년 후에 내가 이렇게 반드시 누군가에게 말해줄 수 있는 날이 오길 고대해 본다.


레시피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너무나 맛있는 나만의 오징어덮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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