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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쳤지만 스치지 않은...

by 돛이 없는 돛단배

매일 지하철 안, 출퇴근길.
성수와 과천을 오가며 사람들 틈을 비집고 걷는다.
사람들은 늘 바쁘다.
서로를 볼 여유도 없이 각자의 목적지만을 향해 달려간다.
나는 그 흐름에 섞이지 않으려 조심스레 벽 쪽에 붙어,
속도를 맞추며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상하지 않은가.
서울이라는 도시에 20년 넘게 살며
그토록 많은 사람들과 얽히고설켰음에도
단 한 번도 지하철 안에서, 길 위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다는 것.

한때 같은 사무실에서 일했고,
밤새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사람들.
분명 그들 중 누군가는
성수나 강남, 명동 어딘가에서
나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내가 몰라본 걸까,
아니면 그들이 고개를 돌린 걸까.
어느 쪽이든 진실은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도 시선을 피했고,
누군가는 사람들 틈에 조용히 몸을 숨겼을 것이다.

내 걸음걸이는 누가 봐도 이상하기에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모른 척하기 어렵다.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는 걸음이다.
그런데도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구도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적은 없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보면 반가울 것 같은 사람이
나를 알아봐도 아무 말 없이 지나가면
왠지 모르게 서운하다.
하지만 또, 나 역시 어색할 것 같은 사람이라면
제발 나를 알아보지 않길 바란다.
참 이중적인 마음이다.

나 역시 몇 번은 분명히 알아보고도
모른 척한 적이 있다.
괜히 어색할까 봐,
괜히 감정을 건드릴까 봐.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용기도,
이어갈 의지도 없어서.

나란 존재는 그런 것 같다.
함께 있는 상황에서는 나름 친근하게 대하지만
굳이 다시 마주하고 싶은 존재는 아니다.
그저 상황 속에서만 유효한 사람.

그리고 결국엔
존재감 없이 흐릿해진 관계로 남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인연.
그래서 더 미련 없고, 더 공허하다.

관계는,
끊기지 않으면 무거워지고
무거워지면 결국 피하게 된다.
다시 엮이기도,
다시 마음을 쓰기도 귀찮아진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억지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가까웠던 사이일수록
더 조용히, 더 완벽하게 스쳐 지나간다.

설사 인사를 주고받는다 해도
단둘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다.
기억을 꺼내기엔 낡았고,
지금의 삶은 서로에게
더 이상 설명조차 어려운 것이 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모른 척이 더 나은 선택이 된다.

어쩌면 그들도
나를 알아보면서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불편해질까 봐.
그 시절의,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던
애매한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아서.

그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가볍게 안부를 묻기엔
이미 생긴 거리감이 너무 크고,
그 거리엔 공감도, 교집합도 없다.
그 공백은 어느새
되돌릴 수 없는 간극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점점 사람을 잃는다.
어떤 다툼도, 상처도 없이—
그저 아무 일도 없었기에,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것 같기에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들.

그 끝엔 침묵만 남는다.
기억나지 않는 이름들,
감정이 사라진 얼굴들.
이름 없이 스쳐가는 그들 속에서
나도 조용히 지워진다.

지나치고,
지나쳐지고,
그리고 잊혀진다.
서울은 그렇게
모른 척의 거리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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