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그 단어는 내게 평생토록 감히 입 밖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금기어처럼 여겨져 왔다.
마음 깊숙이 묻어두는 것조차 벅찼고,
어설픈 표현이나 지나친 진심이
상대에게는 무게로 다가가 내 마음의 본뜻을 비틀어버릴까 두려웠다.
나의 진심이라 해도,
그것이 타인에게 불편함으로 닿는 순간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이 부서질 테니까.
감정을 내보였다가,
지금보다 더 깊은 고립에 내몰릴까 봐,
나는 늘 조심스러운 손으로 편지를 쓰고,
망설이는 손끝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고백’이라는 단어는
내 삶의 언어 속에서 결코 발화될 수 없는,
침묵의 동의어였다.
그런 나에게는,
3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곁을 지켜준 여자가 있었다.
마치 잔잔한 물결이 모래사장을 쓰다듬듯,
말없이 조용히 내 삶의 곁에 스며든 사람.
그녀는 내 고단한 삶에 스며든, 한 줄기 따스한 햇살 같았다.
때로는 서툰 펜 끝으로 눌러 쓴 글에
조용한 공감과 온기를 담아 건넨 답장으로,
때로는 새벽의 정적을 나누듯 오간 짧은 메시지 속에서
‘혼자가 아님’이라는 은근한 위안을 내게 건넸다.
그러나 그녀는 비장애인이었고,
나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누구보다 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의 감정은 애초에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고,
그 마음은 언제나 비밀로 숨겨야만 했다.
결코 도착하지 않을 편지처럼,
끝내 발신되지 못한 메시지처럼
내 마음은 늘 봉인된 채로 있었다.
멀리서 그녀의 웃음이 배어 있는 글귀들과
배려가 묻어난 말들을
가슴 속 어딘가에 차곡차곡 접어 넣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세상의 차가운 편견과 눈앞에 놓인 현실의 벽 앞에서
나는 매번 한 걸음 물러선 채,
무력한 감정 속에 갇혀 지냈다.
그렇게 나는 닿을 수 없는 한 사람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바라보며,
멈춰버린 시간 속에 고립된 채 살아왔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지
30년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숨겨진 마음의 무게에 눌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간절함,
어쩌면 이것이 내 생의 마지막 용기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는 오래된 마음을 담아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글로 옮긴다는 것은
내게 있어
세계의 가장 깊은 문을 노크하는 일과 같았다.
나의 결핍과 불편함이 그녀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그 생각이 내 문장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돌에 새기듯 편지를 썼고,
여러 번 고쳐 쓴 메시지 안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마음의 조각들을 써내려갔다.
오랜 시간 동안 너를 좋아해 왔다고,
이 애틋한 마음이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너만을 향해 있었다고.
하지만,
예상대로 그녀는 지금이 더 좋다고, 이렇게 친구 사이로 지내는게 좋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곧이어 일상적인 내용으로 대화는 흘러갔다.
나의 진심이 담긴 간절한 고백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평온한 반응 속으로 조용히 묻혀버렸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무너지는 데에는 예고가 없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희미한 기대마저
소리 없이 무너졌고,
나는 내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무언가를 불편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깊은 자괴감에 잠겼다.
30년 동안 조용히 쌓아 올렸던 감정의 탑은
‘변함없는 우정’이라는 말 앞에서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나의 세상은 다시 침묵과 고독으로 돌아갔고,
그녀와의 어색하지 않은 듯 어색한 관계를
더 이상 예전처럼 지속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먼저 연락하지 않았고,
그녀의 메시지에는
짧고 건조한 말로만 응답했다.
그렇게 서서히 우리는 서로에게 뜸해졌고,
그로부터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격렬했던 감정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이제 내 마음은 무덤덤한 일상 속으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문득, 오랜 시간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 묶음을 바라보거나,
더 이상 새로운 메시지가 오지 않는 텅 빈 채팅창을 볼 때면,
그녀가 더 이상 내 곁에 없다는 현실이 낯설고도 아프게 다가왔다.
그 마지막 서툰 고백의 순간에
나는 대체 무엇을 바랐던 걸까.
그건 애초에 닿을 수 없는 꿈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에 남긴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은
너무도 평온했기에 오히려 잔혹했고,
그 말 이후로 남은 것은
후회, 아쉬움,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절망뿐이었다.
고백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변함없는 우정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깊은 슬픔과 외로운 그림자뿐이다.
나는 여전히 그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의 감정은 애초에 허용되지 않은 것이었고,
그 마음은 언제나 비밀로 숨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