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 하나,워킹 홀리데이 막차를 타고 호주로떠났다. 그땐 몰랐다. 그곳에서 인생 사기꾼을 만나 큰 빚을 지게 될 줄, 나이 서른에 인생 난이도 Max로 올려놓고 남은 인생을 시작하게 될 줄, 귀국 후 5년 만에 빚을 다 갚고 나이 마흔엔 그 사기꾼에게 감사하게 될 줄.
교직 6년 차. 1년간의 휴직. 당시 모아놓은 돈 5천만 원을 올인한 과감한 투자였다. 투자기대 수익은 1년의 휴식과 그곳에서 얻게될 다양한 경험이 전부였다. 사람들은 말렸다. 지금 돈 모아놓아야 한다고, 결혼 초기에 돈 모아놓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사람들의 애정 어린 조언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유심히 듣는 척했지만 내 결정을 막을 만한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때마다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중에 후회할지 안 할지는 그때 가서 확인해 볼게요.
그런데 지금 떠나지 않으면 지금 당장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들의 조언에도 일리는 있었다. 나는 아내의 유학휴직에 따른 동반 휴직이었기 때문에 월급이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동반 휴직은 호봉 인정도 되지 않으니 귀국 후엔 동기들보다 1호봉 적은 월급을 받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딱히 걱정되진 않았다. 나는 최저생계비만 있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도이미 알고 있었다.
막상 호주 유학을 준비하려니 모든 게 낯설었다. 당장 집을 어디로 구할지, 일자리는 어떻게 구할지, 핸드폰 개통은 어떻게 하는지 등등.그때 우리에게 접근한 여인이 있었다. 사기꾼 K.
당신이 대한민국에 살면서 사기를 한번도 안 당해봤다면 그것은 진짜 사기꾼을 아직 못 만나봤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K는 지금껏 살면서 만난 사람모두를 통틀어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말이 청산유수처럼흘러나왔는데, 완급조절도 완벽해서 대화하다보면시간 가는줄 모르고 빠져들었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곤 했다. 물론 나는 그런 말빨 따위에 현혹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에 웬만하면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녀는 믿을 수밖에 없었는고 하니,그녀를 나에게 소개시켜준내고모가 그녀의 어머니에겐 생명의 은인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상상해보자. 내 어머니의 생명의 은인 같은 분이 있는데 그 조카가 내가 사는 나라에 유학생으로 온다?이거야말로은혜를 갚을 절호의 찬스 아닌가?나라면 두 발 벗고 공항에 나가 픽업부터 해주겠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내가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역이용해 뒤통수를 쳤다.
사실 돈을 되돌려 받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K의 어머니가 호주를 찾아왔을 때 꼬박 며칠을 투자해 관광 가이드 역할을 하기도 했고, 그해 여름 잠깐 한국에 들어갔을 땐 그녀의 집에 가서 K 어머니의 허드렛일을 대신 처리해주기도 했다. 그 말인즉슨, 그녀의 어머니 집 주소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K가 나에게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K의 어머니를 찾아가 '당신 딸이 제 돈 들고 튀었으니까 돈 돌려주세요'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K에게 돈을 다 털리고 나서야소름 끼치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었다. K는 처음 접근할 때부터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걸 파악하고 접근했던것이다.
"얘는 내가 돈 들고 튀어도 내 부모 찾아가서 해코지는 못할 애구나."
아직도 K가 처음 우리를 도와준다며 접근했을 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내가 외국에서 오래 살아 봤잖아. 외국에서는 한국 사람을 제일 조심해야 해..."
그때의 썰을 자세히 풀자면 책 한 권 분량이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 멈추고 다시 본 주제로 넘어가자.
나는 왜 이제 와서 사기꾼 K에게 감사하는가?
2013년의 어느 밤을 기억한다. 이메일을 통해 사기꾼 k와 연락이 닿았다. 그날 확실히 깨달았다. 돈을 돌려받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지금과 달랐다.돈을 극단적으로 아끼는 사람이었다. 점심값 몇천원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수천만 원의 돈을 날려버렸으니 얼마나 절망이 컸겠나?답답한 마음에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살면서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다. 이럴 때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구나. 담배라도 피우면 좀 나아지려나. 술이나 마실까. 아니야. 술 마시면 나만 힘들어져. 난 억울한 피해자일 뿐인데 왜 내가 힘들어야 해? 화가 가라앉지 않자 심호흡을 했다. 시원한 공기가 폐부까지 들어왔다 나가니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현실을 되돌릴 수 없다. 후회하지 말자. 후회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후회는 호주에서 있었던 행복한 기억들마저 덮어버릴 것이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레슨비 낸 셈 치자. 후회할 시간에 하루라도 빨리 빚 갖고 더 나은 사람이 되자. 언젠가 지금의 일을 떠올리며 웃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귓가에 맴도는 노래가 있었다. 후회라는 감정이 괴롭힐 때마다 주문처럼 부르는 노래였다.
Another turning point, a fork stuck in the road
Time grabs you by the wrist, directs you where to go 또 다른 갈림길 위에 서있을 때,
시간이 당신의 손목을 잡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줄 거예요
So make the best of this test, and don't ask why
It's not a question, but a lesson learned in time 그러니 이 시험에서 최선을 다하고 이유는 묻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교훈이니까
It's something unpredictable, but in the end it's right
I hope you had the time of your life 예측할 수 없지만 결국엔 그게 옳아요
당신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길 바랍니다
So take the photographs, and still-frames in your mind
Hang them on a shelf in good health and good time 사진을 찍고 그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세요
청춘과 좋은 기억들을 선반에 걸어놓으세요
Tattoo's of memories and dead skin on trial
For what it's worth, it was worth all the while 기억의 타투와 죽은 피부가 심판대에 오르겠지만
모든 것은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어요.
It's something unpredictable, but in the end it's right
I hope you had the time of your life 예측할 수 없지만 결국엔 그게 옳아요
당신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길 바랍니다
- <Good riddance> , Greenday
그린데이가 공연을 할 때마다 마지막 앵콜곡으로 부르는 이 노래는 미국 학교의 졸업식에서 졸업생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로 손꼽힌다. 시신 해부를 앞둔 의대생들이 시신을 앞에 두고 그의 숭고한 마음에 감사를 표하며 불러주는 노래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날의 나를 앞에 두고 앞으로의 새로운 나를 다짐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나니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맡바닥에서부터 샘솟았다.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웃으며 그때의 일을 떠올릴 그날이. 나는 이제 사기꾼 k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사기꾼 K. 잘 지내고 있나요?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꿔줘서 고마워요. 이제 전 당신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다 지난 일이고 전 지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요. 다만 저는 이제라도 당신이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외국에 나가면 한국 사람부터 조심하라는 그 말, 또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지는 않나요? 당신도 그러면 안된다는 거 알잖아요. 이젠 나이도 꽤 드셨겠네요. 당신도 어려서부터 객지 생활하느라 힘들었을텐데, 이왕 태어난 거 좋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다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