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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Oct 03. 2024

가자, 우리만 아는 그곳으로

<Somewhere only we know> - Keane

이젠 진짜 때가 왔다고 느꼈다. 헤어질 결심이 더 늦어지면 분명 생의 끝에 후회할 거란 확신이 들었다. 명예퇴직금을 검색해 봤다. 이 돈으로 40대 중반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1급 정교사 자격증은 사회에서는 워드프로세서 자격증보다도 쓸모없었다. 교대 졸업 타이틀은 사실상 고졸 타이틀과 다름없었다. 아, 이래서 선생님들이 그렇게 그만두고 싶단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거구나.


노는 물만 바뀌는 것 뿐인데.

다른 직장에 다닐 수 있다 해도 더는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두겠다는 건데 또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라고? 아니야. 그럼 지금과 뭐가 달라? 결국 선택지는 하나만 남았다. 사업.

그러나 사업은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나에게 가족이 없었다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쉬운 선택이었을 명예퇴직 후 창업 플랜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가족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 됐다.


사업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일이 뜻대로 안 풀렸을 때의 후폭풍을 나 혼자 감당하는 건 별 문제가 아닌데, 가족이 있으면 가족이 그 짐을 나눠 짊어져야 한다. 두 딸을 생각할 때마다 긍정회로의 불은 자주 꺼졌고, 부정회로불은 상시 대기 상태 전환되었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사업이 잘됐을 때 펼쳐질 일보다 사업이 망했을 때 덮쳐올 일들을 더 자주 상상했다. 가끔 "저는 사업에 열 번 실패했는데 열한 번째 겨우 성공했어요.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따위의 인터뷰를 하며 자신의 성공을 미화하는 사람을 다. 그건 그에게 그만큼의 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여러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큼의 돈. 아마도 그 돈은 부모로부터 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엔 패자부활전이 없다.



그때 떠오른 대안이 여행사였다. 여행사 창업은 큰돈이 들지 않는다. 1인 여행사는 더 그렇다. 대학교 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데리고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여행사를 만들라고, 여행사를 하면 대박 날 거라고 말해줬던 게 떠올랐다. 나 또한 그때를 떠올려보면, 일일 가이드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여행이  좋았다. (여기서 점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데리고'에 찍힌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행 갔을 때 행복한 사람이지, 그날 처음 보는 사람과 여행 갔을 때에도 행복 사람은 아니었다. 여행사 예행연습을 해보고 얻은 깨달음이다.)


모든 사업의 성공여부를 가르는 열쇠는 차별화다. 왜 굳이 그곳을 이용하는가? 음식점을 예로 들면, 특별히 맛이 좋던지, 가성비가 좋다던지, 주인장이 친절하다든지 하는 차별화 요소가 있어야 그곳을 다시 찾게 된다. 내 여행사에도 이런 차별화 요소가 필요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여행사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코스부터 차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여행사를 차린다면 자기가 첫 손님이 되겠다고 말했던 건, 내가 가이드했던 여행의 코스가 다른 여행사와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받았던 피드백은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너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돈도 안 들고 사람 없으니 한적해서 참 좋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려주지 마."

"소문대로 믿고 보는 한빛투어가 맞네."


그래, 이거다! 다른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가고 싶어도 어디 있는지 모르기에 갈 수 없는 여행지들을 보물찾기 하듯 찾아다니는 여행!여행사 이름은 '날마다 소풍', 여행 코스 이름은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날의 날씨 상황과 당일 여행 구성원들의 나이, 체력 등에 따라 각 상황별 최적의 코스를 구성하려면, 여행지와 그 여행지들을 최단 시간 내에 연결할 이동 동선을 미리 짜놓아야 했다. 휴일마다 새로운 여행지를 개척하고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여행지와의 동선 및 소요시간을 계산해 가며 여행 코스를 짜나갔다.


당일 날씨, 참가자의 체력 등을 고려하여 총 3가지 코스를 짰는데, 코스의 여행지가 겹치지 않게 하려 몇 군데 여행지는 새로 개척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코스의 여행지가 겹치면 안되는 이유는 여행사를 한 번 이용한 여행자가 다음에 재방문했을 때 갔던 곳을 또 가게 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내가 가보지 않은 숨은 여행지어떤 곳들이 있을까? 이럴 때 나는 '제주의 숨은 명소'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 본다. 제주에는 나처럼 사람들이 가지 않을 만한 곳들만 찾아다니는 무림의 고수들이 있고, 그들이 인터넷에 공개하는 장소 중 한 군데씩만 알아내도 여행 코스의 빈 부분을 채우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런 장소들의 특징은 글쓴이가 그곳의 위치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위치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를 알기에 그곳이 어디인지 묻 않았다. 사진에 나오는 장소와 키워드를 단서로 직접 찾아나서면 될 일이다.



찾는 방법은 단순하다. 예를 들어 장소 소개글에 '도순천, 상류, 자연휴양림 근처'라는 키워드가 있으면 우선 구글 위성 지도부터 확인한다. 도순천 쯤에 있겠구나 추정되면 추정 위치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부터 한라산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천 트래킹을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바다 방향으로 내려가는 것보다는 한라산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훨씬 안전하다.) 그러다 보면 내가 사진으로 보며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그곳이 짠- 하고 나타날 때가 있다.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나중에는 저 오르막만 넘으면, 저 나무에서 우회전하면 그곳이 나오겠구나 하는 촉 생.


마다 내귀에서 자동 재생되 피아노 반주가 있었다. 딴딴딴따 딴딴딴따 딴딴딴 딴 딴따다- 그 피아노 반주는 여행지 발견 직전의 설렘을 최대치로 증폭시키는 마법의 주문 같았다. 잠시 후,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신 것 같은 보컬의 깨끗하고 청명한 미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내가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장소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이미 한도초과였다.


<Somewhere only we know> 뮤직비디오 중

언젠가부터는 일부러 포인트 발견 1-2분 전에 이 노래를 BGM으로 깔아놓게 됐다. 포인트 발견을 자축하는 나만의 세리머니였다. 이 노래는 제목부터 'Somewhere only we know(우리만 아는 어딘가)'인 것이, 내가 꿈꾸는 여행사의 컨셉과 딱 맞아떨어졌고, 그렇게 여행사의 주제가가 되었다. (실제 가사는 연인이 되고픈 누군가에게 지금이라도 내 마음을 받아달라는 세레나데에 가깝지만, 의미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제가 기막힌 여행사 만들었는데요. 함께 가보실래요?' 정도로 바꾸면 뜻이 얼추 통한다.)  


I walked across an empty land

나는 텅 빈 땅을 걸었지

I knew the pathway like the back of my hand

어디로 가야 할지 손에 쓰여 있는 듯 잘 알았지

I felt the earth beneath my feet

내 발 밑의 땅을 느끼며

Sat by the river and it made me complete

강가에 앉아있으면 영혼이 충만해지는 기분이었어


(중략)


And if you have a minute why don't we go

시간 있으면 우리 같이 가지 않을래?

Talk about it somewhere only we know?

우리만 아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자

This could be the end of everything

모든 게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

So why don't we go

그러니 우리 같이 가 보는 게 어떨까?

Somewhere only we know

우리만 아는 그곳으로

Somewhere only we know

우리만 아는 그곳 말이야

- Keane, <Somewhere only we know> 중



아쉽게도 여행사 플랜은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났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을 모집해 4번에 걸쳐 예행연습을 해봤는데, 내가 상상했던 그림과 너무 달랐다. 체로 행복했지만 늘 행복하진 않았다. 늘 좋을 수만은 없는 여행지 날씨처럼 행이 늘 좋을 없었다. 그게 꿈을 접었다.


여행  코스 중 하나였던 범섬뷰 캠핑카 티타임


반전은 그후에 일어났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을 모집해 여행사 예행연습 투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주위에서 자기들도 데려가라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난 것이다. '이런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모르는 사람들을 모아 테스트해보기 전에 부터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게 그들의 한결같은 논리였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이미 꿈결처럼 흩어진 얘기입니다만... 그래도 가실라우?


뒤늦게 그들과 여행사 코스로 여행을 떠났다. 우리는 여행 내내 행복했다. 코스 중간에 그전에 나도 가보지 않은 샛길로 빠졌다가 더 예쁜 여행지를 발견하기도 했고, 점심시간에 수다를 떨다가 두시간이 지나버려 다음에 가야 할 여행지를 건너뛰기도 했다. 여행 마지막 코스는 '군산 오름에서 별멍 하며 각자의 시간 갖기'였는데, 저녁 식사 시간에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바람에 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다음에 또 가면 되니까. 지금도 잊을만하면 다음 여행은 또 언제 가냐 보채는 연락 온다. 이 정도면 꽤 쓸만한 여행사 아닌가.


다음 여행에서는 대망의 여행지 등장  <Somewhere only we know>을 BGM으로 깔아줘야겠다. 새로운 장소를 발견했을 때의 설렘을, 우리만 아는 어딘가를 찾아간다는 두근거림을, 이제 우리만 아는 어딘가를 공유하게 됐다는 뿌듯함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내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사업자 등록만 안 했다 뿐이지, 돈을 못 번다 뿐이지, '날마다 소풍'은 여전히 내가 경영하는 1인 여행사고, 주제가는 <Somewhere only we know>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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