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피 지망생 Sep 04. 2024

로드 투 헤븐

<Something new> - Axwell & Ingrosso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2008년 2월 6일, 전역 신고를 마치고 위병소를 통과하는 내 기분이 그랬다. 나에게는 전역 몇 달 전부터 품었던 소박한 꿈이 있었다. 스쿠터를 타고 제주의 해안도로를 질주하는 꿈이었다. 전 재산을 털어 충무로에서 비노 50cc를 샀다. 인천항에서 스쿠터를 배에 싣고 제주로 금의환향했다. 전역과 청춘, 객기 등의 단어들이 시너지를 일으켜 낭만은 이미 한도초과였다.  순간을 잊지 말자 다짐하고 온몸의 감각세포를 깨웠다. 스로틀을 땡기고는 온 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을 기억 속에 담았다.

   

하지만 그때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감정도 반복되면 감정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것을. 질주의 감흥을 가능한 오래 유지하려면 뭘 해야할까?기종을 바꿔 속도를 높이면 될까? 군대를 갓 전역한 민간인에게 돈이 있을 리가. 같은 날 전역한 친구 둘을 꼬드겨 스쿠터 제주도 일주나 하기로 했다. 


기대를 너무 많이 걸까? 출발 몇 시간 만에 마음이 식어버렸다. 대학교 때 이미 자전거로 돌았던 코스를 그대로 답습한 게 패착이었다. 결말을 아는 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이랄까. 친구 둘의 표정이 밝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친구 둘은 그날이 처음 스쿠터를 탄 날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분이 좋은지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첫날 목적지의 3분의 2를 달렸더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때마침 저 멀리 송악산이 보였다. 송악산을 지나고 편의점이 보이면 잠시 쉬기로 하고 송악산 오르막길에서 스로틀을 땡겼다. 그때까진 몰랐다. 몇 초 후 우리가 마주하게 될 장면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줄은.


"와!"


한 글자면 충분했다. 한 글자 뒤에 느낌표 하나만 찍어주면 느낌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곳. 뒤에서 따라오던 친구들의 감탄사가 뒤이어 도착했다.

"와! 뭐야? 완전 미쳤는데?"

오르막을 오르자마자 한라산과 산방산, 형제섬, 사계 앞바다가 한순간에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뭐야?이런 곳이 있었어? 이런 곳이 왜 여태껏 유명해지지 않은 거야? 희한하네... 이만하면 '신비의 도로'나 5.16 도로의 '숲 터널'처럼 별칭이 붙을 만도 한데... 주위를 둘러봐도 도로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름은 내가 지어주겠다.

로드 투 헤븐.


그러고 보니 이 도로,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언제 지나갔더라?아, 맞다!졸업여행으로 떠났던 자전거 제주도 일주!그런데 왜 그때는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아마 그때 나는 지쳐있었을 것이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오르막이 끝나길 바라며 눈앞의 땅만 보며 페달을 밟느라 먼 곳의 경치는 바라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곳의 킬포는 오르막을 오르자마자 시야가 한순간에 뚫린다는 것인데, 자전거 속도로 그런 느낌을 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곳을 지날 때 나와 같은 느낌을 느껴보고 싶다면, 반드시 차나 모터바이크를 타고 가바란다.



* 주소는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77-3'. 여러 차례 테스트를 해봤는데 시속 40-50km일 때 청량감이 가장 컸다. 속도가 이보다 느리면 청량감이 떨어지고, 너무 빠르면 불안하다.(오르막 끝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름)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EDM이라는 음악에 빠지게 되었고 그때보다는 업그레이드된 바이크로 그곳을 다시 찾게 되었으니 사연은 이렇다. 당시 한창 좋아했던 DJ 중에'Axwell&Ingrosso'가 있었는데 그들이 신곡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목은 <something new>. 캬- 역시 음악 하나는 기똥차게 잘 뽑아낸다. 뮤직비디오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져서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를 검색했다. 그렇게 나의 오랜 지병이 재발하게 될 줄이야. 참 오래 앓았고 이젠 완치됐다고 믿을 때마다 다시 찾아오는 그 병. 병명은 '멋있으면 따라 해봐야 직성이 풀림 증후군'.

직비디오 내용은 별 거 없다. 노을 지는 도로에 모터바이크 한 대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바이크의 뒤를 쫓으며 라이더에게 일어나는 일 테이크로 찍을 뿐이다. 도로 위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파티를 열고 있다.

차에 탄 채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 키스하는 사람, 드럼 치는 사람, 일몰 사진을 찍는 사람, 차를 때려 부수는 사람... 파티가 끝난 도로위에 정체불명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라이더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다른 멤버가 등장해 라이딩 합류. 둘은 Axwell&Ingrosso의 심볼인 Λ가 새겨진 가죽 재킷을 입고 있다.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은 그들은 다시 나란히 도로를 질주한다.


이게 뭐라고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지. 나도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들처럼 텅 빈 도로 위 소실점이 되어보고픈 마음. 이미 내 마음은 제주도의 어느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제주도 어디를 가면 [something new]의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까?


30km를 달려 신창풍차해안도로부터 찾았다. 노을의 색감은 참 예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일단 내가 찾던 느낌은 아니었다. 노을해안로로 장소를 옮겼다. 사람은 덜 북적였지만, 역시나 내가 찾던 느낌은 아니었다. 이 두 도로는 뮤직비디오의 도로와 뭐가 다른 거지?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도로는 넓은 들판 위에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다. 반면 신창풍차해안도로와 노을해안로는 구불구불하고 한쪽에 바다가 펼쳐진 해안도로였다.


제주도에서는 뮤직비디오처럼 도로가 쭉 뻗어서 지평선 끝에서 소실점이 생기는 도로를 찾을 수 없는 걸?그때 뇌리를 스치는 곳이 있었다. 아, 맞다! 로드 투 헤븐! 쭉 뻗은 일직선 도로는 아니지만 로드 투 헤븐을 역방향으로 돌면 뮤직비디오 같은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이미 어둠이 노을을 삼키 있었다. 다급한 마음에 속도를 높였다. 로드 투 헤븐에 도착했을 , 노을 내 마음을 알아준 걸까. 자기도 아직 어둠에게 잡아먹히긴 아쉽다는 듯 마지막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때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마트폰에 미리 저장해 둔 <Something new>를 틀었다. 볼륨을 최대치로 높이고 스로틀을 땡겼다. 그렇게 소실점이 되었다.

위 빌-롱 투 썸-띵 뉴. 때마침 들려오는 가사가 오래도록 귀에 맴돌았다. 분명 나는 새로운 세계로 연결되고 있었다.




I see the down of a new beginning

This time, this time we can't go home

I hear the streets of tomorrow calling

I go, I go where you go

Cause we belong to something

we belong to something new


새로운 시작의 새벽이 보여요

이번만큼은 집에 갈 수 없어요

내일을 향한 부름의 소리를 들어요

나는 당신이 있는 그곳으로 가요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연결되어 있어요

- <Something new> 중

작가의 이전글 우연히 그때 비구름을 통과하고 있었을 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