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살다 보면 날씨 때문에 신기한 경험을 할 때가 많다. 그제 일어난 일도 그랬다. 아이들과 생수천 물놀이장으로 물놀이를 갔는데, 하늘이 어두워지나 싶더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놀고 있을 때 비가 오면 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선명히 드러난다. 놀다가 비가 쏟아질 때, 더 신나서날뛰면 아이고, 그런 아이가 걱정되면 어른이다.
다만 그날은 걱정거리가달랐다.수영장물이 얕아서 아이들은 걱정이 안 됐는데,비가 올 거란 생각은 1도 못하고 열어둔 창문이 문제였다. 창문으로 비가 들이친다면... 아아, 상상하기도 싫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야 하나? 집은 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현실적인 판단을 하자. 지금우리 집에도비가 내리고 있다면,수습은 이미 늦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지금 내리는 이 비가 소나기이길 바라는 것뿐이었다.소나기야, 제발 우리 동네는 가지 말아 주렴.
문제는 이 비가 소나기 같지않다는 사실이었다. 경험상 소나기인 경우에는 이렇게 하늘 가득 먹구름이 깔린느낌은 들지 않는다. 삼십 분 전한라산 쪽에 있던 먹구름은제주의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지금은 우리 집이 있는 동네에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잠시 후엔 우리집 창문 안으로 빗물이 들이치겠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하늘의 뜻을 어찌 거역하겠는가?이미 엎질러진 물. 수습은 집에 가서 하기로 하고 한숨 한 번 쉬고 바닥에 드러누워 잠이나 잤다.
한 시간 후, 갑자기 더워진 느낌이 나서 잠에서 깼더니 비는 그쳐있었고, 방금 전 내린 건 비가 아니라 기름이었던 건가. 세상은 잠들기 전보다 더 달궈져 있었다. 하늘은 거짓말처럼 개어있었고,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갔더니 집에서는 비는커녕 수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어라?내가 더위를 먹었던건가. 모든 것이 꿈이었던가.하도 신기해서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네 동네엔 하루 종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낮에 내가 있던 그 동네에만 비가 내렸던 것이었다. 제주도에 살다 보면 이런 일을 흔히 겪게 된다. 분명 제주시에는 비가 왔는데 서귀포로 넘어와보니 서귀포는 햇볕이 쨍쨍하다든지, 지금 우리 동네는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데, 같은 시각 옆 동네에는 폭우가 쏟아진다든지 하는 일들.
어려서부터 이런 일을 자주 겪어온 나는마음속에귀여운소망을 품었다.
'날씨의 경계위에 서있고 싶다.'
지금 이곳에 비가 내리는데 바로 옆 동네에 햇빛이 쨍쨍하다면, 분명 어딘가에는 날씨의 경계가 있을 것이다. 그 경계를 기준으로 왼쪽에는 비가 오고, 오른쪽에는 해가 비치는 그런 경계. 그 경계에 서서 몸의 절반은 비를 맞고,남은 절반은 해를 맞고 싶다는 만화 같은상상.
현실에서는 그런 순간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비 오는 날, 토네이도의 경로를 쫓는 기상학자처럼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그 경계를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 경계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야 만 기적이 일어났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를 떠올리면 그 순간의 환희가되살아남은물론이다.
그날, 나는 차를 타고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고 있었다. 새별 오름을 지날 즈음, 갑자기비가 퍼부었다. 저 멀리대정 쪽을 보니 햇살이 쏟아지고 있어서 소나기인가 보다 했다. 오늘도 날씨가 참 신기하네 하며 무심히 운전하고 있었는데, 백여 미터 앞 도로에 희미한 선이 보였다.신기한 건, 그 선 뒤로 지금 내가 속한 이곳과는 전혀 다른, 환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설마 저기가 내가 그토록보고 싶어했던 비와 해의 경계인가?심장이 콩닥하는 순간엔 이미 그 경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놀라지도 못했다. 잠시 후, 햇살이 쏟아지는 유리창을 부지런히 닦고 있는 자동차 와이퍼를 보고 나서야지금 이 순간이 그토록 바라던, 비와 해의 경계를 통과하는 순간임을 깨달았다.나도 모르게 외마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와-
올림픽 100m 레이스의 하얀색 피니시 라인처럼 선명한 '꿈의 선'을그렇게 통과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마다 Travis의 노래 제목(Why does it always rain on me)처럼 왜 나한테만 비가 내리냐며 푸념했던 나. 그러나 비는 그동안 날 따라다닌 적 없다는 깨달음. 난 단지 우울했던 그때, 비구름 아래를 통과했을 뿐인 것을, 비구름이 온 세상을 다 덮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해가 비치는 곳을 찾아가면 될 것을, 왜 그리 세상 탓 남 탓하며 불만을 쏟아냈던가.
세상 일이 뜻대로 안 풀릴 땐 내 삶에만먹구름이잔뜩 낀 것처럼 느껴질 땐, 우두커니 서서 세상 한탄하지 말고 일단 그곳을 벗어나면 될지어다. 그럴 땐우산 하나 들고 찾아가자. 해가 비치는 옆동네로.
그러다 보면 갑자기쏟아지는비를 보며,파전에 막걸리 막기 좋은 날이라며, 시원하다며, 창문 밖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좋다며 감사하게 되는 날도 온다.비는 한번도 날 따라다닌 적이 없다.
I can't sleep tonight
잠이 오질 않아요
Everybody saying everything's alright
다들 괜찮을 거라고 하는데
Still I can't close my eyes
여전히 눈은 감을 수 없고
I'm seeing a tunnel at the end of all these li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