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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Apr 15. 2024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뭐

<Whatever> - oasis


대한민국의 초등 교사가 평생 동안 들어야 할 연수의 개수는 몇 개나 될까?다 세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100개는 거뜬히 넘어가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이들 중 실제 학급 운영에 도움 되는 연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연수는 '내가 이걸 왜 들어야 하지?'로 시작해 '내가 이걸 왜 들었지?'로 끝난다. 그렇다고 안 들을 수도 없다. 매년 학기 초마다 '이번 연도에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 연수 리스트'라는 이름의 메신저가 날아온다. 이걸 학년말까지 듣지 않으면 독촉 메신저가 날아올 게 뻔하므로 싫어도 일단 들어야 한다.


연수 대부분은 원격연수로 진행되기 때문에 솔직히 큰 부담은 없다. 나름의 방법으로 현타만 슬기롭게 극복하면 될 뿐. 다만 연수 앞에 '일정'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서 '일정'이란 '일급 정교사'의 준말로, 초등교사 4년 차에 반드시 들어야 하는 '자격' 연수를 말한다. 이 연수가 왜 중요하냐면, 이 연수 성적에 따라 먼 훗날의 승진 시기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꾸준한 문제 제기 끝에 제도가 개정되어 일정 연수 성적의 파급력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들었다)


일례로 내 친구 둘은 일정 연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는 바람에 지금 섬에서 근무하고 있다. 섬에서 근무하면 승진에 필요한 가산점이 주어지는데, 일정연수 점수를 잘 받으면 섬에서 근무하지 않아도 됐다고, 자기들은 일정 점수를 못 받아서 그 점수를 만회하고자 지금 섬에서 근무하는 거라고 친구 둘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일정 연수는 경쟁이 치열하다. 뒷자리부터 채워지는 다른 연수와 달리 일정 연수는 앞자리부터 채워진다. 문제는 연수가 심각할 정도로 재미없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후회 안 하려면 일정 연수만큼은 목숨 걸고 들으라는 선배 교사들의 조언 때문에, 일정 연수 점수는 연수 종료 즉시 학교로 통보되며 그 점수는 평생을 따라다닌다는 겁박(?) 때문에 열심히 들어보려고 했지만, 연수는...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결국 일주일 만에 나는 경쟁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출석 점수만 채우기로 했다. 연수가 한창이던 둘째주 금요일 오후, 수업을 같이 듣던 나와 당시 내 여자친구는 강의실을 유유히 빠져나와 락페스티벌로 향했다. (이 여자 친구는 먼 훗날 내 아내가 된다) 그것은 이 경쟁에서 우리 둘은 빠지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뮤즈와 함께한 그 밤은 더없이 아름다웠으므로. 뮤즈의 'starlight' 전주에 맞춰 1-2-1-3 박수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3만 명의 관중과 함께 치는 장면은 내가 일정 연수를 끼고 이 자리에 와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루했던 일정 연수는 그렇게 났다. 그리고 나에겐 꿈이 생겼다. 언젠가는 일정 연수 강사로 저기 저 무대 위에 서겠다고. 그땐 이런 지루한 연수 말고 진짜 후배 교사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강의를 하겠다고.




몇 년 후, 064로 시작되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교육청 장학사 ooo입니다. 이번 여름에 탐라교육원에서 일정 연수를 하는데요. 거기에 강사로...

"

순간 몸이 조금 떨렸던 것 같다. 내가 꿈꾸던 장면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때의 얼떨떨함.


강의 제는 '마술과 함께 하는 교실 수업'이었다. 역시 뭐라도 배워두면 언젠가는 써먹을 날이 온다. 솔직히 강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한창 힙합에 빠져있던 시절이라 시작하자마자 랩으로 자기소개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이 장면은 지금도 떠올리면 내면의 이불킥을 하게 된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강의 마지막 부분만 떠올려보자면,


"사실 제가 준비한 강의는 여기서 끝났구요. 남은 시간은 제가 평소에 여러분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몇 년 전, 저는 저는 저 맨 뒷자리에 앉아 가 강사라면 어떻게 강의를 할지 상상하며 지루함을 버텼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강의 주제와 상관없이,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평소 후배교사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신나게 떠들었다. 사실 이 모든 건 강의 마지막 '퇴장 퍼포먼스'를 위한 빌드업이었다. 내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퇴장 퍼포먼스 시나리오]

1. 후배 교사들에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요약한 노래 하나를 BGM으로 틀어놓는다.

2. 스크린에 그 노래의 가사를 띄어놓는다. 

3. 쉬는 시간에 가사와 함께 들어보라고, 가사가 와닿는 사람이 몇 명은 있을 거라고 말한다.

4. 시크하게 퇴장을 한다.


아, 그 노래 제목이 뭐냐고? 

'Whatever'.


(가사)

I'm free to be whatever I

Whatever I choose and I'll sing the blues

If I want

내가 뭘 하든, 뭘 선택하든 나는 자유로워

블루스를 부르고 싶으면 블루스를 부르는 거야


I'm free to say whatever I

Whatever I like if it's wrong or right

it's alright

나는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어

그것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Always seem to be

You only see what people want you to see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넌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에만 신경 쓰는 것 같아

(이하 생략)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나는 평생직장이라 여겼던, 20년간 몸담은 직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10년 전 후배 교사들에게 말했던 대로, 강의 마지막에 퇴장 BGM으로 틀었던 'whatever'의 가사대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내 갈  가려한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불안의 파도가 밀려들 때면 '다른 삶을 살아볼 수 있도록 국가에서 허락(?) 해준다면 마지막 날 퇴장 세레머니로는 뭐가 좋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것으 불안의 파도를 넘는다. 지금까지의 계획은 이렇다.


1. 마지막으로 함께 근무한 선생님들께 감사인사를 한다.

2. 신발을 신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3.'Whatever'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4. 가사를 목청껏 따라 부르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온다.


그렇다.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다.

블루스를 부르고 싶을 땐 블루스를 부르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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