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패킹
# 백패킹 : 배낭 하나에 캠핑에 필요한 장비를 모두 챙겨 떠나는 캠핑 스타일
한밤의 오름 정상, 별빛을 배경으로 조명이 켜진 텐트 하나, 캠핑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한 남자. 지금 보면 저 사진은 어떻게 혼자 찍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미스터리한 사진이 그때는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는지.
저기 혼자 있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밤에 오름 위에서 바라보는 제주의 야경은 어떤 모습일까? 그곳에서는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잘 보일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했다.
당장 텐트와 침낭부터 샀다. 밤에 텐트 안에서 할 게 책 읽는 거 외에 더 있겠나 싶어 LED 조명도 하나 사고 나니, 떠나는 일만 남았다. 집 거실에 텐트를 치고 예행 연습을 했다. 텐트 안에서 딸과 놀아주면서 아내에게 ‘소풍 마일리지’를 쌓은 다음 아내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 최대한 예의 바르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 하루만 오름 백패킹 갔다 올게.”
‘하루만’이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알면서도 아내의 허락을 받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가면 무섭지 않겠어요? 조심해서 갔다와요.”
아내의 결재가 떨어졌다. 막상 혼자 가려니 조금 무섭긴 했다. 하지만 설렘이 훨씬 컸다.
백패킹에는 역시 모터바이크다. 내 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두 눈 안에 담을 수 있고, 사각 프레임에 갇힌 풍경이 아닌 탁 트인 시야를 얻을 수 있으며, 기분을 한껏 들뜨게 만드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차로는 가기 힘든 좁은 길들이 많아서 모터바이크 타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생각보다 사진 속 오름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핸드폰을 잃어버려 핸드폰을 찾느라 20여분을 허비하고 나니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행히 오름 방향으로 난 오솔길을 발견하고 냅다 뛰었다. 해지기 전에 텐트를 쳐야 제주 동부 오름 군락의 실루엣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오름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부랴부랴 텐트를 쳤다.
세상과의 단절, 대자연 속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모든 감각 세포들이 깨어나는 느낌이다.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바람이 살결에 와 닿는 느낌을 느껴보기도 오랜만이다. 생각이 깊어진다. 이런 느낌이구나.
밤이 깊어지고 백패킹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무기, 미리 살짝 얼려온 맥주와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냈다. 지겹도록 들었던 김광석의 노래들이 오늘따라 다르게 들린다. 밤하늘의 별들도, 바람에 풀이 눕는 소리도, 저 멀리 밤바다에 떠 있는 밤배들의 행렬도, 모든 것이 새롭다.
낭만은 여기까지. 야밤에 혼자 이름 없는 오름에서 잠들려니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사람은 무섭지 않은데 -깊은 밤 이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더 무서울 거다- 오름 주변의 말이나 소가 텐트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김광석의 술 땡기는 노래 덕분에 술 한 잔 더 하고 겨우 잠들었지만, 결국 소와 말이 텐트를 덮치는 악몽을 꾸고 새벽 3시에 잠에서 깼다. 이왕 깬 거 잘됐다 싶어 텐트 밖으로 나왔다. 쉼 없이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들과 도시에서 새어나오는 불빛들이 밤하늘과 어우러진 모습이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실사판을 보는 듯했다. 다시 자려고 누웠더니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일출은 보지도 못하고 텐트를 접었다. 이렇게 혼자 있고 싶을 때,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그곳이 있어서, 다시 사람의 품이 그리워지면 기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어서 행복했던 하루.
그 후로 백패킹의 매력에 빠져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자유롭게 떠다녔다. 어디를 가든 오름은 오름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 나름의 느낌이 있어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시원한 맥주와 블루투스 스피커만 있으면 그걸로 됐다. 어두운 밤 나만 혼자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는 두려움도 조금씩 무뎌져 이제는 혼자 가더라도 일출을 보며 일어날 수 있을 만큼 마음도 편해졌다.
백패킹을 시작한 후로, 어디를 가든 근처에 텐트를 칠만한 장소가 있는지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는 성산일출봉이 바라다 보이는 해변가가 너무 예뻐서 텐트를 치려는데, 이곳이 4.3사건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파도소리에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같이 실려 오는 듯 했다. 그 후로 아무리 아름다운 장소일지라도 4.3사건 유적지에는 텐트를 치지 않는다. 누군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곳에서 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지금 그곳은 백패킹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그 사람들은 그곳에 묻힌 사연을 알고 저렇게 웃고 떠드는 걸까?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 땅 위에 그와 같은 비극이 일어났는지, 비극이 일어난 장소는 왜 이리 많은 건지, 백패킹을 가려던 곳에서 4.3유적지 표지판을 발견할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진다.
* 백패킹에 얽힌 추억 하나.
호주 울룰루 캠핑 투어. 지구의 배꼽(울룰루의 별칭) 위에서 캠핑을 한다니 이 또한 낭만이겠다 싶어 캠핑 투어를 선택했다, 고 하면 거짓말이고 다른 리조트 투어가 너무 비싸서 캠핑 투어를 선택했다.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한 캠핑 투어는 리조트 투어 부럽지 않은 강렬한 기억들을 선물해줬다.
우리가 여행했던 곳은 사막 지형이어서 물이 아주 귀했다. 목마름이 극에 달했을 때 가이드가 깜짝 선물로 건넸던 맥주는 지금껏 내가 태어나서 마신 맥주 중 가장 맛있는 맥주로 남아있다. 둘째 날은 혼자 양산 쓰고 저만치 앞서가다 사라진 홍콩 아주머니를 찾느라 전 구성원이 수색작업을 벌인 사건이 복선을 깔더니, 급기야 우리가 탄 버스가 캥거루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가이드가 버스에서 내려 캥거루에게 다가가길래 캥거루를 살리려고 내리나보다 했는데, 갑자기 버스에서 삽을 꺼내더니 캥거루를 내려쳤다.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부상이어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죄책감은 숨길 수 없었던지 헛기침을 하며 돌아오던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울룰루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태양의 빛에 따라 시시각각 옷을 갈아입는다는 울룰루의 선셋을 감상하며 저녁을 먹는 시간이었다. 버스 위에 미리 실어놨던 땔감으로 불을 피우고 군대에나 있음직한 대형 냄비에 재료를 한데 담아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초호화 버스가 우리 옆에 세우더니 한 눈에 봐도 부티 나는 사람들이 내렸다. (그렇다고 우리가 빈티 났던 것은 아니다, 라고 정신승리를... 부러우면 지는 거다) 이내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라는 이름의 호화 뷔페가 준비됐다. 자본주의의 양지와 음지를 한 프레임 안에 넣고 지켜보는 것 같아 씁쓸했지만, 기대를 뛰어넘는 울룰루의 선셋쇼 덕에 돈 없는 서러움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초호화 버스가 떠나자 명장면이 탄생했다. 우리 투어 팀원 중 몇 명이 뷔페 테이블로 가더니 테이블을 치우던 사람에게 남은 음식을 먹어도 되냐고 물어봤다. OK 사인! 푸하하, 음식 앞에는 국경이 없구나 하면서 다 같이 주인 떠난 만찬을 즐겼다. 여기서 끝났다면 자칫 비루하고 가난한 투어로 기억에 남았을텐데, 가이드의 말 한 마디가 우리를 가장 비싼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다시 봐도 백패킹의 매력을 한 문장에 담아낸 명문이 아닐 수 없다.
“저 사람들은 오늘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잠을 잘 거예요. 부러워하지 마세요. 오늘 우리는 오백만개의 별 아래에서, 그 별들을 바라보며 잠을 잘 겁니다.”
실제로 흙바닥에 침낭 하나 깔고 텐트도 없이 잤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약속대로 눈만 뜨면 오백만개의 별이 보였고, 난 그 별들 아래에서 잤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