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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Nov 23. 2020

지금 이 순간이 켜켜이 쌓여

딸과 함께 이부자리에 누워 이 얘기 저 얘기하다 지친 사람이 먼저 잠드는 게 요즘 나의 '가장 확실한 행복'이다. 소확행이라고는 못하겠다. 소소 하다기엔 너무 큰 행복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날도 첫째 딸 단비랑 나란히 누워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에 대해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단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단비야? 자?"

2초간의 정적, 잠시 후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아! 그때 참 재밌었어요!"

"그때? 언제?"

"그때! 아빠가 배 만들어줘서 태워줬던 그 날"

"아빠가 배를 만들어서 태워줬다고?"

"우도에서 아빠가 배 만들어서 나 태워줬잖아~!!"


그제야 스는 기억 하나.

몇 년 전에 전복 사고를 겪고 지금은 폐기 처분한 싸구려 공기주입식 카약! 그 카약이 멀쩡히 제 기능을 할 때, 단비를 태우고 우도 앞바다를 항해(?)했던 그 날! 그래, 그런 날이 있었지...


큰 물고기를 발견했다든지 파도가 쳐서 배가 흔들렸다든지 하는 별다른 이벤트 없어서, 너무도 평화롭고 평범해서 잊어버렸던 그 날을 단비가 기억하고 있었다니...


내 마음 한가운데 돌멩이 하나가 톡 하고 떨어지더니 동심원이 되어 퍼져나갔다. 이번엔 내가 조용해졌다.


그날 이전까지, 나에겐 아이와 함께 놀아주지 못할 때마다 둘러대던 핑계가 있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기억 못 할 텐데, 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 이전의 일들은 전혀 기억 잖아? 이런 이유로, 이번엔 아이들이랑 신나게 놀아줘야지 하다가도 쉬고 싶어질 때면 만능 치트키를 꺼내 게으른 나를 합리화하곤 했다.


'어차피 어른 되면 기억 못 할 건데 뭐...'


그런 철옹성 같은 생각에 단비가 균열을 내고야 만 것이다.


물론 단비어른이 되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빠와 배를 타고 놀았던 그날의 기억을 잊어버리지만,

그 순간 행복했던 추억은 단비의 마음 어딘가에 켜켜이 쌓이겠구나! 무의식이라는 이름의 폴더에 차곡차곡... 그렇게 무의식에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추억 하나하나 언젠가 단비가 딛고 설 단단한 땅이 되어주겠지.


그날의 깨달음 이후로, 조금은 부지런한 아빠가 된 것 같다. 처가가 있는 우도에 갈 때마다 이번엔 뭘 하고 놀아줄까, 하며 한 번이라도 더 고민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여기까지가 11월 초에 파도타기를 하게 된 사연이다. 11월이지만 바닷물은 아직 따뜻고(바다는 땅보다 한 계절이 늦다), 작으나마 파도가 계속 밀려드니, 바다로 나가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패들보드에 끈을 묶고 밀려드는 파도에 맞당겨더니 제법 재미있는 놀이가 됐다.

이름하야 자연산 후룸라이드!


단비의 삶도 그날처럼, 날마다 소풍 같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제 삶이 날마다 소풍 같다고 느껴지는 날이 오걸랑, 패들보드에 끈을 묶어 힘껏 당겨주던 아빠를 떠올려주길.

난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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