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힘들어도 돌아갈 수 있는 곳

by 한걸음

긴 연휴의 시작, 오랜만에 추석이 돌아왔다.


그동안 시간이 나지 않아

볼 수 없었던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화목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매번 연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아쉬움과 섭섭함이 남는다.


어린 시절, 이러한 날을 아무렇지 않게 보냈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맞이하는 연휴는

위와 같은 마음이 갑작스레 들었다.


마냥 어릴 것만 같던 사촌 동생들도 점차 커가고

사촌 누나와 형 마저 이제는 더 이상, 어린 나이가 아니다.


사촌 동생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늘 즐겁다.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왔기 때문에

관심사도 똑같고, 좋아하는 음식마저 비슷하다.


특히, 남동생이 나랑 노는 것보다 더욱 재미있어한다.


맛있는 음식도 시켜 먹고, 요즘 근황에 대해

물어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평소에 카톡이나 인스타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기에 어색함이란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추석에 외할머니께서 외박을 나오셨다.

더위가 심상치 않던 8월의 여름 때 뵙고 두 달 만에 오신 것이다.


병원 밥은 할머니께서 입맛이 맞지 않아, 끼니를 거르시고

편히 집에 오셔서 밥을 좀 드시려면 배가 불편해하셨다.


이불에 누워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계속 틀어두시는데

할머니께서 병원 생활을 하시기 전에도 즐겨보시던 방송이었다.


엄마는 할머니께 그랬다.

"엄마는, 왜? 다른 프로는 안 보고 이것만 본가?" (사투리)


빨간색 긴팔, 그리고 호피 무늬의 고무줄 바지.

먼 산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은 여전히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번에 가장 아쉬웠던 점은 할머니께 말을 많이 걸어드리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나는 이렇게, 말로만 할머니께 잘해드려야지 하며 다짐하는데

막상 행동으로는 실천을 안 한다.


몇 번 오지 않는 전화를 받기 귀찮아하며 거절하고

받는다 하더라도 한 두 마디하고 끊는다.


그래서 할머니 집을 나설 때 안아드린 후, 두 손을 꼭 잡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 전화 못 받아도 서운해하면 안 돼!! 학교 갔다 집 와서 자버리고 그러니까 내가 한 번씩 전화할게."


항상, 할머니께서 병원 외박을 나오실 때 엄청 기대를 하신다.


나와 엄마, 그리고 셋째 이모는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 가족들보다 엄청 크지만

외박을 끝마칠 무렵이면, 항상 상처를 받고 들어가신다.


가족 간 소통에 불협화음이 생겨 다툼이 일어날 때면

"나, 인자 두 번 다신 안 나올란다잉" (사투리) 이런 말씀을 종종 하셨다.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참 많은 우리 엄마.

말은 과격하고 화가 많아 보여도 할머니께서 치매 판정을 받으셨던 날.

엄마가 소파에 앉아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코로나로 병원 면회에 어려움이 있었던 때.


우리가 직접 찾아뵙지 못하니, 드시고픈 음식도 드시지 못해

할머니께서 항상 엄마에게 전화를 통해 말씀을 하셨다.

쉴 새 없는 할머니의 모습에 엄마가 한번 화를 내신 적이 있다.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던 엄마였지만, 그래도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

힘이 들어도 다 챙겨드렸다.


병원에 도착해, 저 멀리 할머니께서 창 밖으로 엄마를 부르며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던 때도 있었다.


나는 비록 22살의 적은 나이지만,

주변의 어른 분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나이를 드실 때 기분이 뭔가 묘하다.


어딘가 여행을 떠나거나, 무언가를 먹을 때나

작은 변화 속 그러한 점을 느끼는 듯하다.


세월이 지나, 내가 만약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힘들고 지쳐도, 그대들의 따스한 품 속에 안겨

기댈 수 있는 것.


그것에 감사함을 느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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