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리다. 대면, 응시 속에서 망가진 계산기로 응급의 숫자를 떠올리는가 하면, 변방의 장군이나 작은 나라의 지도자가 튀어나오고, 쓸쓸한 첫새벽 먼동을 쓰레받기에 슬슬 쓸어 담는 청소부나, 음탕한 여인이 되어 복수밖에 모르는 꽃대를 흔들거리고, 밤느정이 진동하는 여기서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방황하는 이방인이나, 온 곳을 또 오고 또 와, 이곳이 능숙한 길라잡이 되어 너의 앞잡이를 하기도 한다. 아이의 아빠이거나 어린 자식이 되고, 늙거나 아주 어린 소년이 되는 것은 줄줄 흐르는 물과 같아서, 껍데기만 벗으면 훌훌 흘러가고, 떠내려가는, 그것은 일도 아니다. 오롯 삼매에 첨벙 빠져 호미를 들고 한 밭에 쭈그려 앉아 은하수가 십만 팔천 번 내린 하늘을 엉엉 우는 속이 있고, 비칠거리며 또 일어나 “괜찮아”하며 씩 웃어 보이는 것도, 열린 문 탓이라.
그러하니 만래용변萬來用變, 못 박힌 '위치'야! 문 앞에서 지금 죽은 고정을 발설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