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한자(漢字)는 성조로 하여 그 기의(歧義), '의미'를 발돋움을 한다. 즉 여러 뜻을 품은 함의(含意)로의 용적을 자랑하는 것이다. 현재는 그 성조가 쇠락하여 대륙에서 4개의 성조로 표의, 통용된다.
한글은 성조가 없으며 표음의 문자로 알려져 있고, 합(合)이 없이는 그 한 자에는 의미가 없다고들 함으로 나락에 빠진다. 이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편협하고 게으른 하품 같은 소리이다. 한국인은 그 직관력만으로도 한 글자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판단할 수 있다. 가령 "아"에 맞는 상황이다. 고함의 '아', 탄식의 '아', 깨달음의 '아'는 이미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세상에서 '아'자로 발음되는 모든 소리의 뜻(값)을 획득해버린다. 낱자 모두가 우주어로, 그 의미를 넓게 지닌 체, 쓰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한탄스러운 것은, 끊기고 수탈당하며, 게으름으로 방치한 연구이며, 한글을 천대한 무식한 기득 계급들의 수치스러운 역사이다.
중국은 그 많은 글자(실은 그림)의 수량으로 치매예방에 좋으며, 두뇌계발에 유리하다 말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글에 내재된 전달력과, 빠른 습득의 위력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실책의 소리이다.
중국에는 한자의 해석(정확하게는 그림의 설명)과 그 유래들로 하여 그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공구서(工具書)를 사용하고 있다. 나는 오로지 이 그림들로 한글이 담을 수 있는 기의(歧義)를 나타내고, 그리며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한글 한 자로 4 성조의 한자 의미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한자를 한글의 공구서'로 삼는 것은 큰 재미이다.
우매한 학자들만이 여적, 중국말을 숭앙한 나머지 상형의 그림 그리기를 그들의 법칙과 그들의 궤도대로 알려고 할 뿐이다. 심오한 그림 또한 절정의 예술에 닿겠지만, 한국에서의 한자사용은 반드시 중국과 달라야 맞다. 말 뿌리가 모국어인 한글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림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아두고 억지 해석을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이것 또한 삼가야 할 내용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그 언어의 사용으로 인종의 분류가 가능해진다. 한국에는 토종이 많이 남지 않았으니 바로 한국인과 외국인으로의 양분이 가능해진다는 말씀. 비단 말의 사용에 따른 분리뿐 아니라, 정신과 행동의 이식과 세뇌의 정도를 가지고도 이 양분이 가능한 지경에 도달한 것이다.
교(敎)와 육(育)은 나라를 지속하고 연결하는 알짬이다. 이것이 주로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인가? 학교와 집회의 장소, 즉 종교이다. 이 '教', '가르침'이란 게 대관절 무엇인가? 이식과 세뇌, 분열과 분리의 지렛대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타당한 것인지 되돌아 짚어볼 때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사들이 강조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교육'과 '학교'였음을.
우리의 것을 가르치고 가리키고, 우리의 것을 수호할 때 비로소 외부로 나아가 '우리'로 발돋움할 수 있겠다. 지식이란 이로움의 기록이며, 이 '이로움'을 널리 이롭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다. 수탈과 계급의 획득으로 악용, 아집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수단이 아니다.
타국에 살아도 한국인의 뿌리를 내리고 한국인으로 끝까지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한국에 살면서도 외국인이 많다, 이것은 너무나 함부로 제 나라를 쉽게 내던지는 성품이다. 이제 아예 그 종자를 끊고 버려야만 그나마 힘겹게 지켜온 혼을 지키게 될 것이다.
물질만능주의란 그 배고픔에 팔아버린 '자기買賣'의 전적(轉籍) 임에도, 폭력과 회유, 유혹과 거래의 흔적임에도, 자기를 다시 되찾을 궁리조차 하지 않게 되는, 큰 마비(全神麻痺)의 저주(詛呪) 임을 파악하고, 사방에서 몰려든 주술사, 부라퀴 집단의 주문에서 벗어나야 한다.
中華人民共和國과 大韓民國의 가장 큰 차이는 대국 소민과 소국 대민의 차이인데, 지금에 도달하여 이마저 말할 수 없게 되었음이 아플 따름이다.
미국과 일본, 야욕의 몇 부라퀴 무리들이 그동안 강제로 개줄을 묶고 끌었다면 중국이 앞으로 팽배하여 그 짓거리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이 전에 오래도록 조복 하고 아첨하던 역사의 증명이 있었으니 더욱 경계할 일이다. 무지한 숭배와 찬탄, 아첨 이전에 스스로의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게 맞다.
얕고, 어설픈 글이나 심정이 전달되어 부족한 부분이 이곳저곳에서 차오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