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드러운 필기감에 정직한 마찰음
잃어버리기 잘해서 몇 가지 방법을 쓰고 있다. 같은 장소에 물건을 두면 찾는 일도 빠르다. 한 번에 많이 준비해서 한 두 개 정도 없어져도 티 안나게 지속하는 방법이다. 요즘에는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는 일이 다반사다 보니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하면서 헛헛한 웃음 짓는 일을 미리 예상하고 그냥 하나 더 구매하는 방법까지 쓰고 있다. 다음에 어디선가 나오면 그때 그 물건을 쓰면 된다는 심정으로.
어디서 나오더라도 어색하지 말라고 라미 사파리 만년필을 같은 모델로 세 개 가지고 있다. 보고 있으면 든든하다. 좋은 글을 쓸 거 같고 내 인생의 기록자 같다. 케이스 색은 짙은 회색으로 된 것만 3개를 구매했다. 두 개는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 내 핫트랙에서 구매했는데 이번에 좀 다른 걸 구매할까 하고 갔다가 관성에 끌려 라미 만년필을 다시 구매했다. 특별히 필기감이 좋다 보다는 좀 투박한 듯 하지만 심플하고 멋 내지 않다도 은근히 멋진 독일인의 감성이 느껴진다. 원래 사고 싶은 건 몽블랑이지만 내 돈 주고 사기에는 좀 아쉽고 누군가 선물로 준다면 받기에 딱 좋다는 생각으로 아직까지 직접 구매는 안 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몽블랑 만년필 한 번 못써보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조금 있기도 하다.
나머지 하나 라미 펜은 예전에 혼자 가는 해외 출장 길에 비행기 시간은 남고 마땅히 시간을 보낼 일 없어서 공항 면세점을 둘러보다가 '한정판'이라는 말에 덥석 구매한 제품이다. 친절한 소개에 흡족한 마음으로 선물포장까지 했다.
"선물할 거니 포장해 주세요"
브라운 색 바탕에 대각선 무늬가 있는 포장지로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셨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일주일 남 짓 출장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서 짐을 풀면서 이제 제대로 보겠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지를 뜯었는데 어라 웬걸 내가 주문했던 건 짙은 회식 케이스의 한정판 컬러였는데, 분명히 설명을 듣고 그럼 이걸로 하겠다고 해서 점원 분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상황에서 실수로 검정 케이스를 넣은 사실을 늦게 알았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공항 면세점에 전화를 했고 상황을 설명했더니 다행히 그때 포장했던 점원도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적절히 대응해주셨다. 주소를 알려주면서 택배로 보내면 교환해 주겠다고 한다. 마침 오전 비행기로 도착한 평일이라 피곤하지만, 주소지가 용산인걸 보고 직접 갈려고 했더니 직접 방문은 안되고 우편으로 보내는 건만 된다는 답변에 조급함을 누르고 우편으로 일을 처리했다. 이런 사연이 있는 펜인데 지금은 '특별대우' 없이 많은 펜 중에 하나로 대우받고 있다. 주말에 쓰는 에코백에도 있다가 출퇴근 가방에도 있다가 책상에 있다가 한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펜이다.
한 때는 죽고 못살다가도 새로운 대체제가 나오면 뜨겁던 시절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래도 아련한 기억과 그리움으로 마음에라도 남는다면 행복한 동행이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라미 펜은 부드럽게 펼치는 글씨도 또렷하면서도 부드럽지만 '사각사각' 마찰음을 내면서 종이를 가로 짓는 소리도 일품이다.
누군가 라미 펜을 왜 쓰는지 묻는다면 필기감은 기본이고 펜촉이 종이에 닿아서 내는 비껴가지 않고 종이면이 지그시 누르면서 잉크를 뿜으며 내는 마찰음이 일품이라서 항상 곁에 둔다고 말할 것이다.
곁에 두면 좋은 친구다. 기쁨도 나누도 슬픔도 나눈다. 언제나 내 감정의 첫 발산은 라미 펜을 통해서 나간다.
#hanxs #만년필 #라미 #LAMY #몽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