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에 책임지는 자의 조건
지인 H와 저녁식사를 하려고 약속 잡은 곳은 야외 테라스에서 식사가 가능한 장소다. 테라스 자리는 오픈 장소라서 행인들이 다닐 수 있지만 왕래는 드물다. H가 5분 전에 도착했으니 결과적으로 5분 늦게 약속 장소에 온 셈이다. 정확하게는 늦었는지 정시인지 애매한 약속을 했다. 사무실 근처로 장소를 정한 건 나다. 정리하고 차로 나오면 10분이 안 걸리는 근거리다. 평소에도 종종 가던 곳이라서 걸어가도 되는 거리지만 퇴근하면서 저녁을 먹을 요량으로 지인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한 약속이다. 분명 멀리서 출발한 지인보다 내가 먼저 갈 줄 알았고 그랬어야 했는데 지인은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다. 한산한 식당이다. 낮에 주로 왔었고 저녁은 처음인데 우리 말고 우리와 같은 라인에 손님 둘이 앉아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의 식당인데 주변 공원과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해서 의자에 앉아서 아름드리나무와 산책로를 볼 수 있는 탁 트인 시야는 교외에 나온 듯하다. 한가위가 가까운 9월 하순의 가을 저녁은 낮의 열기는 식고 서늘한 기운에 담요가 필요한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날씨다.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H의 시선은 내 왼쪽 어깨너머에 있는 게 느껴졌다. 한두 번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한참을 지속한 대화 중에도 시선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자 '뭔지?' 하는 약간의 불쾌함과 궁금증이 동시에 들어서 고개를 완전히 왼쪽으롤 돌려 등 뒤를 보았다. 식당에 먼저 와 있던 손님 둘은 동네에 산책 나온 듯 편안한 운동복 차림이었고 의자에는 하얀색 말티즈 한 마리가 우리 쪽, 정확하게는 내 앞에 있는 H를 깊이를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시간, 식사 어때요?' 그가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말이라도 걸어올 것처럼 우리 쪽, 아니 H를 보고 있었다.
H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나를 향해서 말을 했다.
"강아지가 심심한가 봐요, 강아지 기르고 싶은데, 너무 귀여운데..."
"기르면 되죠, 길러요"
출근하고 나면 집에 혼자 있을 강아지를 생각하며
"그러고 싶은데, 애들이 불쌍하잖아요. 하루 종일 혼자 있는 게"
"요즘엔 혼잣서도 잘 먹고 놀 수 있고 웹캠으로 놀아주면 되잖아요"
"그래도 아니죠"
호기심보다 더 진실한 마음이 느껴졌다. 반려견도 가족이니까.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오는 심정이라면서 아무리 좋아도 그건 아닌 거 같다고 했다. 나도 인정했다. 주인의 위안과 즐거움을 위해서 하루 종일 혼자서 외롭게 지내야 하는 반려견의 입장을 생각하면 비견(非犬)적 처사인 거 같다.
진정 원하는 것을 하려면 책임감 있는 관리가 전제돼야 하는 게 맞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때가 나의 몫이다. 아무리 좋고 괜찮아 보여도 좋은 면 순간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방관하는 건 진정한 반려의 자세가 아니다.
아파트 저녁 산책길에 많은 반려견과 견주들을 본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 못지않게 어쩌면 더 정성스러울 정도로 강아지들의 행동에 반응해 주고 인내심을 보여준다. 같이 나온 아이에게 화내는 부모의 모습을 본 적 있지만 반려견에게 화내는 견주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는 건, 사실 놀랍다.
반려견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않을까?
하나 더, 반려견에 보여주는 인내와 이해의 폭이라면 사람들 사이에 얼굴 붉힐 일은 거의 없겠다 싶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hanxs #반려견 #말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