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계절, 암릉을 올랐다. 거북손과 같은 모양으로 우뚝 솟아오른 바위들. 바위들 사이에는 소나무들이 뿌리를 내렸고, 이른 시기에 연분홍 꽃을 피운 진달래가 절벽 사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움트는 생명의 기운을 가쁜 숨을 고르며 어렴풋이나마 헤아려 본다.
산을 오르는 도중, 예전에 보았던 티베트고원 다큐멘터리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해발고도 8,000m가 넘는 히말라야 14좌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 티베트고원을 지나가는 등반가들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 터를 잡고, 고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카메라에 비친 등반가들의 눈빛 속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고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마주치면 연신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해발고도가 높아지면서 이들의 분위기는 보다 대비되었다. 정상을 목전에 둔 베이스캠프에서 기상 상황이 급변했을 때, 눈부신 설산의 풍경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자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한 돌풍과 눈보라는 암막을 두른 듯이 주변의 시야를 가리고, 몸을 얼어붙게 했다. 매서운 한기가 그들의 눈에 어렸다. 거센 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줄을 붙잡고선 그들은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들의 발걸음을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고원 위에서 그들이 마음속에 붙들고 있었을 원을 생각해 본다.
또 다른 고원을 그리며 산을 오르던 날. 신발은 문어 빨판처럼 쩍쩍 소리를 내며 바위에 달라붙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였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예상했던 자연의 풍경이 가지런하게 펼쳐져 있었다. 노새의 방울 소리와 같은 바람이 귓전에 스쳐 지나간다. 가본 적 없는 공간에 대한 기시감과 고원에 대한 동경이 한데 섞였던 날. 암릉에서 고원을 그리다.
세월이 예리하게 다듬은 갈색 봉우리
사계절 녹지 않을 푸석한 눈을 밟고선
눈앞을 가득 메우는 회색 돌계단
아득한 풍경과 하나 되는 여정
말을 앗아간 잿빛 낭떠러지 아래
헤아릴 수 없는 높이에 울렁이는 기시감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해지자
제멋대로 요동치는 생각들
돌덩이처럼 경직된 두 다리를 떼다
아린 손을 움켜쥐고 연신 두들기던 허벅지
몸집만 한 짐을 지고 성큼성큼 올라오는 앳된 얼굴
꼬마 셰르파가 말없이 건넨 따뜻한 미소
산을 닮은 야크의 털 위로 길게 뻗은 뿔
옅게 내쉰 가쁜 숨소리를 금방이라도 부러뜨릴 듯
느긋한 발걸음의 회색 노새가 단 방울 소리 또렷해질 때
해발 5,320m부터 이어져 내려온 티베트고원의 기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