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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율 Jul 05. 2022

보말과 거북손

한율 단편선

애월 일몰, 사진: 한 율

 "한 번에 모두 거두어갈 수도 있는 거란다." 할머니께서는 보말을 해감하시면서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맑은 소금물이 점차 뿌옇게 흐려지며 탁해졌다. 빨간 고무대야 속 보말은 그렇게 바다에서 머금은 것들을 게워내고 있었다.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아픔이 될 수도 있단다." 할머니의 시선은 뿌연 물아래에 고정되어 있었다. 넘실거리는 거센 파도 위를 항해하는 듯 할머니의 규칙적이고 절제된 동작은 평소 모습과 대비되었다. 숙연해진 공간 안에는 이따금 바람이 일렁일 뿐이었다.


 그 순간마다 주름진 눈가에 붙은 흰색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그리고 그 바람 끝에는 바다내음이 감돌았다. 말수가 적어지시면서 더욱 깊어진 할머니의 눈동자. 그 안에는 할머니와 함께한 세월의 빛이 어렴풋이 아려있었다.


 어렸을 적에 돌담을 잡고 힘겹게 까치발을 서면 유채꽃이 핀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할머니께서는 그걸 보실 때마다 나를 포대기에 업고 유채꽃밭으로 데려가셨다. 돌담길을 굽이돌면 나타나는 작은 유채꽃밭. 날은 흐렸지만 노란 유채꽃이 가려진 햇빛을 대신하여 더욱 환한 빛으로 생동하였다.


 작은 몽돌 하나도 궁금해하던 시기, 내가 손을 가리키는 것마다 할머니께서는 또박또박 여러 번 이름을 알려주시며 옛날이야기들을 덧붙이시곤 하셨다.  "조금만 크면 자연스레 다 알게 되는 것들이란다." 그때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할머니를 척척박사라고 생각하였다.


 "우리 손주 모처럼 배부르게 먹일 수 있겠구나." 모락모락 김이 나는 삶아진 보말과 거북손. 칠이 벗겨진 고동색 소반 안을 가득 채웠다. 옹기종기 정갈하게 쌓인 거북손과 작은 종지. 갑옷같이 딱딱한 거북손은 할머니의 주름진 손으로 겹쳐지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말국 옆에는 넘칠 것 같은 고봉밥이 놓여있었다.


 "난 너 오기 전에 많이 먹어서 배부르니 내 상관 말고 식기 전에 어서 먹거라."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말씀을 끝마치시기 전에 몸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울룩불룩한 노란 구들장을 지나 건넌방으로 넘어가셔서 티비를 켜시곤 하였다. 낡은 텔레비전이 내는 지지직 거리는 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할머니의 작은 웃음소리.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시곤 멀리서 왔는데 더 먹고 가라며 밥을 꾹꾹 눌러 담아주셨던 우리 할머니. 그래서일까. 당신께서 남기신 그리움은 시간이 지나도 한술조차 뜨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꾹꾹 눌러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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