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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Aug 24. 2020

[밑줄독서] 최갑수 -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26. 개기일식을 닮은 사랑 또는 여행

너의 이름을 머금고 책을 읽는 여름 제주의 오후.
카페의 분위기는 나의 기후가 되었다.
바다가 파도를 토해내듯 이제는 너에 관한 생각들을
다 뱉어내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그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연남동 어느 한 카페에서 <우리는 사랑 그리고 여행이겠지>로 읽었던 이 책을 제주도에서 다시 만났다. 제주도 최남단 모슬포항 근처 작은 책방 '독서의입구'는 내게 너를 만나러 가는 문이였을지도.


너를 처음 본 순간처럼 책에 반응했다. 인생은 사랑과 여행으로 이뤄져 있다고 믿는 나에겐 네가 없는 순간부터 책의 제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그렇게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여로에서 끊임없는 방황을 하고 있다. 지독하게도.


더 이상 여행이 좋아서 여행을 했던 단순함이 아니라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어느 순간 나를 위로하기 위함을 깨달았을 때, 이 여행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위로를 받을 만큼 슬퍼서는 안 되는 것이며, 자기 위로가 필요한 만큼 아직도 슬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제주도에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를 다시 구매했다.


그날 저녁, 제주도 최남단의 하모해변에서 문득 깨달았다. 당신의 우울과 내 슬픔이, 당신의 몸짓과 나의 언어가 만났던 그 순간은 태양이 달에 가려진 개기일식과도 같았다는 것을. 그처럼 짧았던 것까지 어쩜 꼭 닮았는지. 우리의 사랑은 달과 태양이 만났을 때 시작되었지만, 서로가 빛나기 위해서 우리의 사랑은 일치하지 않아야 했을지도.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고 두세 번 소리 내어 읽곤 했다. 가끔 까닭 모르게 울컥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오래도록 방 안을 서성였다.
스스로를 끌어안는 방법은 많다.  그 방법이 내게는 여행이다.
 새로운 것을 향해 자기가 이렇게 마음을 활짝 여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우리의 사랑은 일치하지 않았다.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은 일치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잃어서 슬픈 것은 그 사람 앞에서만 가능했던 나의 모습으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외로움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하고 여행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여행은, 우리 인생에 1을 더해 더 큰 수를 만드는 일,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하고.
그래도 전 사랑이 현대 생활의 가장 큰 불행, 즉 권태로부터 우릴 지켜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모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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