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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Oct 12. 2020

[밑줄독서] 이병률 - 내 옆에 있는 사람

27.  그리움도 일처럼 해야 한다면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미친 상태로 살기엔
너무도 강력한 시간이었음에도
난 꿈에만 나타나는 그녀를
구체적인 존재로 만나기 위해
집이 아닌 바깥을 떠돈 거야.

지겹도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 지겨움을 더 지겨운 일로 덮거나, 한없이 지루한 일상의 중력으로 뭉개려고 하다가도 선선한 가을바람 타고 어느 순간 내게 오는 것이다. 지독하게도.


Bittersweet, 씁쓸함과 쓸쓸함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때마다 여행을 떠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이제는 평생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건 더 이상 순수한 '나'의 모습을 사랑해 줄 사람을 다시 만날 자신이 없다는 말일 수도 있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순수한 나를 보여줄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남의 성격은 현실적이며, 현실의 '조건'이 구체화될수록 삶은 '건조'해진다.  나를 감싼 사회적 조건들, 좋아하는 만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순진무구함으로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세상의 비정함 또는 그렇게 변해버린 나를 견디는 게 어려워 그리움에 빌붙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움을 일처럼 하다 보니, 그리움에 익숙해진 듯 하나 좀처럼 능숙해지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무슨 구원이라도 바라듯 책을 찾는다. 읽고 밑줄 치고 문장을 정리하고 감탄하며, 무엇인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 능력이 곧 글쓰기 능력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 많은 것들을 그리워하며 문장과 사진으로 생각을 그리는 이병률 작가처럼.


작가의 말처럼, 사람에게도 저마다 계절이 도착하고 계절이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네가 지금 내게 어느 계절을 살고 있냐고 묻는다면,  가을처럼 그리움에 물드는 계절이라고 답해야겠다.


낯설고 외롭고 서툰 길에서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 그래서 더 사람다워지는 것, 그게 여행이라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하는 그 좋은 눈빛을 한없이 쳐다보고 바라보다가 그 눈빛이 나에게 좋은 신호를 보내오면 나도 그 눈빛에게 팔을 두르고 오래 같이 가자 할 것이다. 사랑해도 되냐고 말할 것이다.
사랑과 여행이 닮은 또 하나는 사랑이 끝나고 나면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음번엔 정말 제대로 잘하고 싶어 진다는 것.
모든 것이 넘치는 세상에 문득 방문을 하시는 허무와 허전에게, 가을날 문득문득 우리의 심장을 두드리는 이 공허에게 대접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밑줄 친 사람이 되어주세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감히 당신에게 그어놓은 그 밑줄을 길게 길게 이어갈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먼 길을 떠나는 건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겠다는 작은 의지와 연결되어 있어. 일상에서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저기 어느 한 켠에 있을 거라도 믿거든.
모든 감각은 잠에 취해 있었다. 감각이 죽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어느 날은 하루 온종일 집 안에 있는 유리를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나는 흐릿했다.
슬픔을 아는 사람 같았다. 슬픔을 아는 사람에게선 마치 비 온 뒤에 한 차례씩 부는 바람에 실려 있을 법한 비릿한 냄새가 닥쳐와서 이런저런 감정을 섞어놓게 한다. 만나고 헤어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길을 서성이게 된다.
사람에게도 저마다 계절이 도착하고 계절이 떠나기도 한다. 지금, 어느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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