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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Nov 26. 2022

29살 크리스마스에는 부석사 여행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숯제 불덩어리 같이 뜨거웠던 2020년, 29살의 크리스마스


2년 전에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던 글을 발견했다. 29살의 겨울에는 서른 살이 된다는 중압감이 상당했다. 뭐 하나 이뤄놓은 게 없는 상태는 여전히 비슷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진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밀물의 시대를 지나 썰물의 시대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현상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흔한 자기합리화를 해본다.


2년 전에는 영주 부석사와 안동을 여행했다. 처마 위로 넘어가는 해넘이는 소백산 능선과 만나 가장 어두우면서도 밝게 빛났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한 번쯤 해 질 녘 부석사에 가보자. 왜 일몰이 아니라 해넘이인지, 우리의 한 해는 또다시 지는 게 아니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주듯.  


다가오는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자 여러 공간을 찾아다닌다. 누군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방문하며 축적된 시간의 지혜를 그 공간을 통해 얻고자 한다. 서른 살까지 남은 일자를 세는 데는 한 손이면 충분한 시간이다. 다른 세상이, 다른 삶의 모습이 분명 있을 것 같은데 손에 잡히지 않는 막연함이 주름살에 아로새겨지며 선명해질 때, 다시 여행을 떠난다.


서른, 열의 세 곱절이라는 뜻의 사전적 정의처럼 나는 열 살 때 보다 3배는 성장한 사람인지 문득 묻는다.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곱절의 세계에서 인생의 사칙연산을 어떻게 계산할지 자판을 두드린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말을 20대에 몸소 깨달았다면, 30대에는 이 배움을 바탕으로 얻는 것은 곱하고, 잃는 것은 나눔으로써 인생을 재밌게 살 수 있는 계산식을 생각한다.


하나부터 열까지를 정상적인 숫자의 진행으로 간주하는 십진법의 세계에서 십 대의 인생은 옳고 그름을 안내 또는 강요받으며 주먹구구식으로 채워지는 형태의 시기다. (문득 나이 먹을수록 어린 아들을 많이 존중해주셨던 부모님에게 감사하다) 사춘기라는 혼란의 소용돌이는 스물에 다다르기 위한 일종의 춤사위로, 마음은 내부에서 진동하고 있는데, 몸은 학교와 독서실에 갇혀 있어야 하다 보니, 불안하기 그지없는 시기다.


20대는 본인만의 둥지를 틀기 위한 시기다. 감정을 따르기도 불안을 따르기도 미래를 꿈꾸기도 현실에 순응하기도 하며 여러 방향으로 운전대를 튼다.  그렇게 서른이 되면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는 시기가 되어 진정한 의미에서 둥지를 트는 시기가 될 것 같지만, 아직은 이르다. 진짜 서른은 오히려 둥지를 벗어나야만 하는 시기라고 믿는다.


이렇게 글은 '임시 저장'의 상태로 2년 동안 숙성되고 있었다. 그때의 글은 30대를 논하고 싶었으나 세대와 시대를 논하기에는 스스로 너무나 작은 식견 수준 앞에 한계를 느끼고  글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줘야 
 나은 사람이 된다"
<안톤 체호프>


증명의 시기로 여겼던 2021년. 서른 살의 키워드는 용기와 사랑 그리고 여유였다. 스스로 달라질 수 있다는 용기와 사랑에 관한 철학과 관계의 실천 측면에서 조금 더 성숙해졌던 삼십세. 세월은 일상의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기다려 줄 시간이 없다는 듯이 31살의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여유의 감각'은 희미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새롭게 쓰는 이유는 '여유'라는 녀석은 현실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그 현실을 반영한 새로운 사고에서 창조되는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화려한 조명이 가득한 크리스마스에 만난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느꼈던 그 감각. 그때의 여유와 아름다움은 결코 다른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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