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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 ONE Feb 19. 2018

행복의 최면과 편견 그 한 끗 차이

20. 웨스턴 컬처 쇼크,  유럽의 환상과 실상

"한국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덴마크도 싫은 나라로 만들고 돌아오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반대로 한국을 사랑하고 강점을 아는 분들은 덴마크의 의식을 배워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한국에 전했습니다"



    덴마크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한국에서 살고 있는 덴마크인의 인터뷰 내용에 너무나 공감했다. 기차에 앉아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초원을 떠올려 보자. 다음엔 기차에서 내려 초원을 느껴보자. 어떤가. 막상 가까이 가보면 동물들의 똥들이 여기저기서 자신들을 봐달라며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경험을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북유럽은 정말 행복한 국가이며, 유토피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 사는 곳은 어디를 가나 비슷하다.


    우리네의 삶은 겉보기엔 달라 보이지만 내용은 비슷해 보인다. 교환학생의 위치는 겉보기와 돋보기 사이 그 어딘가의 시점에서 삶을 관찰하며 동시에 살아내는 애매함 위에 있다. 이런 애매함이 처음엔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 모호함에서 하나의 질문이 싹튼다. "왜 그들은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1. 왜 덴마크 사람들은 나에게 덴마크어로 말을 걸까?

     "Hvorfor" - '왜'라는 의미의 (보뽜라고 읽는) 이 덴마크어라는 언어가 질문의 시작이다. 공공장소를 가거나 마트를 가거나 그 어디를 가도 덴마크인들은 내게 영어가 아니라 덴마크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게 뭐 어쨌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당장 독일이나 프랑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극히 개인의 경험에 근거하여 말씀드린다. 위의 국가에서도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내게 먼저 독일어나 불어로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동기가 다르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영어를 타 유럽 국가보다 잘하지 못하고, 잘한다고 할지라도 자국 언어 사용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기 때문에 일부러 영어 사용을 자제하기도 한단다.


    우리나라는 어떠할까.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를 해야지. 아니면 최소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굳이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라는 류의 생각들 말이다. 하지만 역설은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에게 처음 말을 걸고자 할 때, 우리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서 발생한다. "저기요?" 아니면 "Excuse me?"


    이게 뭐가 문제냐고? 문제는 아니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다.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일단, 필자가 만난 덴마크 사람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 영어를 나보다 잘했다. 하지만 먼저 그들의 언어인 덴마크어로 말을 걸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극히 아시아인처럼 생긴 글쓴이를 덴마크에 정착한 '이민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했기 때문이다. 백인, 금발 머리, 큰 눈과 오똑한 코를 가진 전형적으로 보이는 외모만이 덴마크, 나아가 북유럽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민자와 난민 유입이 더더욱 확산되고 있는 현재의 국제 정세에서는 말이다. (물론 영어로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학생이었고, 5개월 동안 만난 일반(?) 사람들은 덴마크어로 말을 걸었다.)


2. 유럽의 왜곡된 자유(Freedom)_ "내가 제일 중요해"

    덴마크가 행복한 국가인 이유들을 탐구하고 조명하는 방송들의 공통점은 단점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송의 목적상 단점이 적게 조명될 수밖에 없다. 주말에 버스를 타면, 병맥주를 마시며 버스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부터, 파티 이후 바닥에 가득한 깨진 병 조각들은 시작에 불과하다. 12월이 시작되면 새벽 3-4시가 넘어가는 시간에도 아무데서나 불꽃놀이를 하고, 자전거만 보면 미친 듯이 훔쳐서 중고시장에 팔기도 한다. 코펜하겐 시내에서 벌어지는 총격, 마약 사건들까지. 하지만 그중에서도 뇌리에 남은 두 가지 장면이 한국에 온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첫 번째 장면. 히잡을 두른 흑인 여학생 세 명이 버스를 타자마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냅챗을 하는 듯했다. 처음엔 어린 학생들의 철없는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10분이 지나도 그들의 고성방가는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왜'라는 녀석이 끊임없이 내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왜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조용히 하라고 말을 해야 하나?'. 필자는 지하철에서도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있을 때 인터폰으로 신고를 하는 사람인지라 공공장소에서의 이런 행위를 견딜 수 없었지만, 버스 기사까지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들 나처럼 가만히 있는 줄 알았다. 그 순간 내 눈에 경멸의 눈빛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백인 할아버지가 보였다.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그 사회를 단정할 수 없지만, 그때의 감정과 느낌은 전적으로 내 것이었다. 오싹했다.  "공공장소니까 조용히 하면 안 되겠니?"라는 말만 해도 괜찮을 텐데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답시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분을 삭이거나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두 번째 장면. 유럽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어디서나 다들 담배를 펴댄다. 필자는 담배를 정말로 싫어한다. 흡연 자체는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그 담배 연기, 몸에 밴 냄새가 코를 타고 넘어와 기관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 '민폐'가 싫을 뿐이다. 그래서 유럽 친구들한테 물어봤다. "담배 연기가 비흡연자한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지극히 유럽스러웠다. "l don't mind. Why should l think others?"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제일 중요해"라는 마인드에 점점 단련되고 있는 줄 알았다. 충격적인 모습을 보기 전까지.


    덴마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이른 시간부터 아빠와 엄마가 같이 유모차를 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엔 필자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른 퇴근 시간이 빚어낸 '워라밸'과 양성평등의 참모습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무언가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입김과는 달랐다. 그건 담배 연기였다. 사이좋게 한 팔씩 유모차 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는 담배를 공평하게 쥐었다. 아기가 담배연기를 맡든지 말든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3. "행복은 선택" _ 수용적 태도의 두 가지 의미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수용성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태도의 '개방성'이다.  우리는 새로운 공간이 자아내는 낯섦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광화문을 볼 때와 에펠탑을 볼 때의 태도가 다르듯이 말이다. 외국인들에게는 그냥 '시청' 이거나 '중앙역' 일 뿐인데,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보는 '현지인'의 마음을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표현했다.

"여행에서 우리는 현재의 밑에 겹겹이 쌓여있는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메모를 하고 사진을 찍는다."

    수용성의 두 번째 의미는 '허용 의지(Willingness to tolerate)'다. 덴마크 교환학생과 유럽여행을 하며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있다. 소매치기를 조심하고, 인종차별을 당하더라도 격하게 대응하지 말고 최대한 무시하라는 내용의 조언이었다.  조언과는 별개로 필자는 악명 높은 로마에서 소매치기를 당했고, 가끔씩 들리는 낯선 이들의 "Fucking Chinese" 선창에 "Fuck you too"로 후창 했다.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 사이의 괴리감은 유럽과 한국의 거리만큼이나 멀었다.  충격은 상당했다. 소매치기야 아시아인들을 집중 타겟으로 삼을 것 같지만, 생김새 가리지 않고 다 훔쳐간다. 인종차별은 차원이 다르다.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생김새 만으로 모욕감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에 한 번, 아무런 대갚음을 해줄 수 없다는 무기력함에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러다가 멘탈을 회복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덴마크 친구인 크리스토퍼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답해주었다. "There are always stupid people all around the world, Denmark is not the Utopia, just part of the world as well". 그랬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이전의 나에겐 '어리석은 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허용 능력이 없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의 허용은 내가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가 되었다. 그들의 악행을 순순히 받아들이자는 얘기가 아니다. 어떤 현상이 이미 발생했다면, 그에 따른 대응만큼은 선택의 영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국을 볼 때 실상만을 보면서 유럽을 볼 때는 환상을 본다. 이런 뇌구조라면 어디를 가나 불행하게 살 사람들이다. 직접 겪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편견과 오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여행도 해보고 가능하다면 살아보기도 해야 한다. 공간의 확장은 곧 사유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주체적 경험의 축적은 곧 선택의 확장이다.  주관적 사고에 객관의 환경을 더할 수 있을 때, 자신의 행복을 '선택'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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