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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예찬

02. 한라산에 대한 첫 설레임_ 성판악코스

by Happy LIm

[ 흰 눈 소복이 쌓인 백록담을 만나다(02.06) ]


2월 6일 드디어 한라산 백록담 등반에 도전했다. 최근 며칠간 한라산에 많은 눈이 내려 아이젠, 스틱, 스패치, 장갑 등 겨울 장비를 단단히 갖추고, 과일, 커피, 김밥 등 먹을거리도 든든하게 챙겼다. 승용차로 제주시내에서 516 도로를 따라 30여분 올라가면 성판악탐방안내소에 도달한다. 그래서 동절기 입산 시간인 새벽 6시에 맞추어 숙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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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이 시간에는 탐방안내소 입구가 빈틈없을 정도로 많은 등산객이 몰려든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에 의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시행되고 있어서인지 50여 명 내외의 사람이 드문드문 보인다. 주차료 1,800원을 납부하고, 화장실도 다녀온다. 느슨해진 등산화 끈도 팽팽하게 당겨주면서 등산 스틱도 꺼내든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을 유지한 체 탐방로 입구로 들어선다.


동절기인 데다 등산로가 울창한 숲 속에 조성되어 있어서 앞뒤에서 걷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 이 시간에 등산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는 듯 모두 헤드랜턴을 머리에 쓰거나 휴대용 랜턴을 배낭에 매달아 등산로를 비추면서 걷는다. 나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핸드폰의 플래시 앱을 켰다. 휴대폰을 한 손에 쥐고 걸어야 하는 불편은 있었지만, 큰 자갈이 깔려있는 울퉁불퉁한 숲길을 지나는 데는 많은 도움이 됐다.


출발할 때는 등산로에 플래시 불빛이 길게 이어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드문드문 보이고, 어느 시점부터는 첩첩산중에 내 불빛만 빛나고 있었다. 척! 척! 척! 등산화가 땅에 닿는 소리, 틱! 틱! 틱! 등산스틱이 자갈에 부딪치는 소리, 휘이익! 휘이익!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 등 주변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갑자기 '한라산에 야생 멧돼지가 출몰했다', '가끔 노루가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등산객을 놀라게 한다'라고 제주언론에 기사화되었던 내용이 머리를 스쳐간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일순간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울창한 숲에서 뿜어 나오는 상쾌한 기운, 동터오르기 직전의 고요함, 무념무상에 빠져들게 하는 산행의 즐거움으로 인해 이내 힐링타임이 된다. 산을 자주 찾는 사람 중 일부는 반드시 그 산의 정상을 다녀와야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산행 그 자체가 좋다. 비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듣고, 눈 내리는 날에는 설경에 취하고, 맑은 날에는 머나먼 곳의 풍경까지도 감상할 수 있어 좋다. 게다가 똑같은 산인데도 계절마다, 코스마다 특색 있는 느낌을 맛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칠흑같이 어둡기만 했던 숲 속에도 밝은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불빛을 비추지 않아도 등산로가 보이고, 숲 속 나무들도 하나둘 그 형태를 드러낸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은 붉은빛을 띤다.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일출 풍경이 더없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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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가량 걸어 속밭휴게소에 도착할 즈음에는 주변이 모두 밝았다. 그제야 이곳저곳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사라오름 입구를 지나면서부터는 산책로가 단단한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겨울에 내린 눈이 등산객들 발걸음에 단단해지고, 눈의 일부가 녹아내려 얼음으로 변했고, 겨울 내내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두꺼운 얼음층을 만들어 놓았다.


높은 곳으로 오르면 오를수록 얼음층은 두꺼워졌다. 최근 내린 눈까지 쌓여 일부 구간은 높이 1미터 정도 되는 등산로 가이드로프와 휀스가 보이지 않는다. 때론 길을 잘못 들어 허리 높이의 눈 속에 빠져들고, 때론 인근에서 한참을 헤매곤 한다. 다행히 폭설 시 등산객 조난사고 예방을 위해 등산로 중간중간 설치된 2미터 높이의 붉은색 깃발을 보고 겨우겨우 제대로 된 등산로를 찾아갈 수 있었다. 참고로, 제주도 세계자연유산본부에 따르면 성판악코스 정상부근, 영실코스 선작지왓, 어리목코스 만세동산 등에 295개의 붉은 깃발을 설치했다고 한다(2008.12월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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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등산로를 헤치면서 어렵게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등산객은 보이지 않고, 주변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다. 드넓은 광장에 가득 쌓인 눈, 그 안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대피소 건물, 고목이 되어 앙상히 서있는 주목나무, 아스라이 보이는 백록담이 어우러져 먼진 풍경을 창출하고 있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20210206_083422.jpg 주) 진달래밭 휴게소 주변의 주목나무 군락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백록담에 이르는 구간은 전망이 좋다. 아래로는 발아래에 떠있는 듯한 흰구름, 한라산 중산간 지대에 드넓게 펼쳐진 오름들, 제주바다 풍경이 이어진다. 위로는 추운 눈밭에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주목나무, 우뚝 솟은 백록담 풍경이 펼쳐진다. 이러한 풍경에 취해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다도 자꾸 뒤돌아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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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백록담을 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마지막 고바위와 마주했다. 급경사에다가 바윗길이어서 자꾸 미끄러진다. 백록담을 몇 분이라도 더 빨리 보고자 하는 마음에 서두르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 메시지인 듯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고, 눈은 주위 풍경에 집중에 본다. 깎아지른 듯한 좌측 능선에서는 흰 눈 속에서 검은 현무암이 살며시 드러나 있다. 덩그러니 놓인 바위이지만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 어느새 고바위를 넘어서 백록담에 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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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한걸음 눈 쌓인 등산로를 헤치고, 고바위를 넘어 드디어 백록담에 도착했다. 드넓은 백록담 주변 들판이 고요하다. 나를 포함 세 명만이 서있다.


가장 먼저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白鹿潭'이라고 쓰인 바위 앞을 찾았다. 평상시 이곳에서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10미터 이상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해 겨우 한두 컷 정도의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은 동서남북을 돌아가면서 바위도 만져보고, 때론 앉아서 때론 서서 여유롭게 셀카도 찍어본다.


그런 다음 백록담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날씨까지 아주 맑고, 주변은 흰 눈으로 덮여있어 백록담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백록담을 선명하게 보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첫 한라산 등반에서 이러한 복을 받게 되니 행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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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음이 짙은 여름날의 멋진 추억(08.07.) ]


군대 간 아들이 제대 후 며칠간 제주도에 머물게 되었다. 아들에게 이번 주말 백록담을 다녀오자고 제안해 보았다. 높은 산을 올라 본 경험이 없고, 등산을 좋아하지도 않은 아이인데 흔쾌히 '그럴게요'라고 대답한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실행에 옮기려고 부랴부랴 한라산탐방예약시스템에 접속하여 입산 가능여부를 체크해 보았다. 3일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다행히 성판악코스의 05:00~08:00 타임 예약이 가능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성판악코스와 관음사코스는 일일 탐방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성판악코스는 일일 최대 1,000명이고, 게다가 오전 5시부터 8시 타임에는 800명까가지만 입산을 허용한다. 그래서 등산객이 몰리는 휴일 오전 5~8시 타임은 대부분 한 달 전에 예약이 동난다. 가끔 예약취소 사례가 발생하는데, 수시로 예약시스템에 접속해 보면 그것을 잡을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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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전날 김밥, 초콜릿 등 먹을거리와 등산장비를 준비해 두었고, 당일 새벽에 일어나 과일, 커피 등을 주섬주섬 챙겼다. 입산 가능시간인 새벽 5시에 성판악탐방안내소에 도착한 후 등산을 시작했다.


등산화와 발이 일체가 되도록 신발 끈을 단단히 조이고, 배낭이 출렁이지 않도록 당겨맨 후 핸드폰 후레시 앱을 켜들고 산행을 시작했다. 이곳부터 속밭 대피소까지는 등산로가 평지를 걷듯 매우 완만하다.


초입부터 급경사가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아들이 ‘한라산 등반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요!’라는 말을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산 후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라고 말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사라오름 분기점을 지나면서 발걸음이 더디어지고, 진달래밭 대피소 이후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며, 백록담이 보이는 곳에서는 숨을 헐떡대더니, 하산 길은 너무너무 길어 포기하고 싶었단다.


성판악탐방안내소에서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대략 2시간 30분이 소요되는 숲길이다. 속밭 대피소까지는 완만하고, 나무 데크와 야자 매트로 잘 정비된 구간이다. 이후부터는 울퉁불퉁한 자갈길과 급경사가 이어진다. 그래서 이곳부터는 발바닥과 무릎이 조심씩 아파오기 시작하고, 체력도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등산 초보자 다수는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만 다녀오곤 한다.

20211003_110759.jpg 주) 속밭 대피소 전경

아들 역시 사라오름 분기점을 지나면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입산 초기 긴장했던 마음이 평탄한 숲길을 지나면서 느슨해졌는데, 울창한 숲길이 2시간 이상 이어지고, 급기야는 급경사가 나타나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아들이 다녀온 가장 높은 산은 청계산이다. 청계산은 해발 618미터이고, 왕복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등산로에서 서울시내와 한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지루하지 않은 산이다. 하지만 한라산은 왕복 8시간 이상 소요되고, 난이도도 높아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한라산 정상을 한 번쯤은 다녀오고 싶어 했던 로망과 군에서 기른 체력을 기반으로 큰 도전을 하게 되어 기특하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가지고 간 과일과 김밥을 먹자고 했지만, 아들은 힘들어서인지 물과 오이 한 조각만 섭취한다. 하늘을 올려보니 서귀포시 방면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귀포시 방면은 구름이 가득하고, 제주시 방면은 더없이 파랗다. 시간이 지체되면 정상에 오르더라도 백록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은 좀 더 쉬었으면 하는 눈치이다. 그래도 ‘물이 가득 찬 백록담을 보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언제 다시 한라산을 오겠니, 힘들더라도 가보자'라고 도전적인 말을 해주었다. 아들은 결실은 보아야 한다라는 굳은 각오로 따라나선다.

20210807_071845.jpg 주) 진달래밭 대피소 전경

대부분의 등산객은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백록담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가장 힘들어한다. 등산로가 가파르고, 돌길과 계단길이 이어지고, 햇빛도 따가워 많은 체력이 소모된다.


한걸음 한걸음 걸으면서 뒤돌아 보곤 하는데 아들이 자꾸 뒤처진다. 때론 숨을 헐떡이면서 줄줄 흘리는 땀을 연신 닦아낸다. 그래서 주변 풍경에 집중하도록 걷는 중간중간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었다. '뒤로 보이는 것은 서귀포 시내와 산방산이다'. '크고 작게 보이는 산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화산이 폭발하면서 만들어낸 오름이다. 제주에 368개가 있다. 어떤 것은 백록담처럼 분화구 내에 물이 가득 차 있고 어떤 것은 2~3개의 분화구가 함께 생성된 것도 있다'. 그럼에도 산행을 마친 후 아들은 ‘이 지점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이 너무 멀게 만 느껴져 백록담 보는 것을 포기하고 싶었어요.’라는 말을 하곤 했다.

20210807_090926.jpg 주) 한라산 중산간지대의 오름군

숲길을 지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들도 헉헉대며 한 걸음씩 올라 정상에 도달했다. 그런데 정작 백록담을 10m 앞에 두고 내가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 쥐가 난 곳이 조금 나아진 후 절뚝거리며 정상에 도착했다. 아들은 가장 먼저 백록담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본다. 어렵게 어렵게 올라와서 인지 감격스러웠나 보다.

20210807_081426.jpg 주) 백록담 인근 계단식 등산로

새벽 5시에 출발하여 3시간 넘게 걷고 걸어서 8시 30분에 백록담에 도착했다. 벌써 5~6명의 등간객이 먼저 와 있었다. 일부는 벌써 관음사코스로 하산하고 있었고, 일부는 이곳저곳에서 셀카를 찍는가 하면 데크에 앉아 가져온 간식을 먹는 사람도 보인다.


등산객들이 몰려들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아들을 불렀다. '한라산 천연자연보호구역 백록담'이라고 쓰인 바윗돌 표지석, '명승 제90호 한라산 백록담'이라고 쓰인 사슴뿔 모양의 나무 표지석, 물이 가득 찬 백록담을 배경 삼아 아들 사진을 몇 컷씩 찍어 본다. 이런 모습을 보고 근처에 있던 등산객 한분이 다가와 아들과 내가 함께한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백록담을 배경으로 아들과 함께한 멋진 사진을 가지게 되었다.


그 등산객은 '블랙야크 100대 명산 도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듯했다. 등산타월과 태극기에 지금까지 다녀온 산 명칭이 빼곡히 쓰여있었다. 한 손에는 '명산 100 도전단'이라고 쓰인 등산타월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서 백록담 표지석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인증사진을 찍어 주었다.


한라산 정상에서 가족과 영상통화를 시도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도 영상통화가 된다는 것은 우리나라 IT 기술의 승리인 것 같다.


'엄마 여기 백록담이에요'라는 아들의 목소리에 집사람이 감동했나 보다. '아들이 아빠와 함께 백록담 앞에 있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네'라는 말을 반복한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들이 한라산을 올라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 했었단다. 아들이 험준한 산을 올라 본 경험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영상으로나마 씩씩한 모습을 보게 되어 정말 뿌듯했다고 한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도 화창하다. 하늘은 더없이 파랗고, 백록담 주변은 진초록색과 연초록색의 수풀로 가득하다. 백록담 안에는 물이 가득하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온다. 한 여름인데도 시원함이 느껴진다. 한라산 등방객에게는 최상의 날씨이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출발할 때만 해도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어서 백록담을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주변 등산객이 이렇게 맑은 물로 찬 백록담을 선명하게 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라고 일러준다.


한라산을 처음 등반한 아들에게는 인생을 살면서 잊히지 않는 날 중 하루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이 한라산 백록담 앞에 서있다는 것 자체가 뿌듯했는지 연신 사진을 찍는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그렇게 힘들어했던 기색도 사라진 듯 보였다.


기념사진도 찍었고, 영상통화도 마쳤으니 이제는 백록담 감상에 집중해 본다. 백록담 최상부는 진초록색 나무가 울타리를 만들고, 중간부는 연초록색 풀이 완만한 능선을 이루며, 하층부에는 하트 모양의 샘에 맑은 물을 담고, 그 물속에 푸른 하늘을 투영하고 있다. 백록담 건너편에는 제주시내와 푸른 바다가 이어진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멋있는 풍경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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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백록담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급기야는 백록담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이렇게 날씨가 급변할 수 있다는 것이 미껴지지 않았다. 월요일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라산을 사이에 두고 서귀포와 제주시내 날씨가 극명하게 갈렸다고 한다. 내가 백록담에 있었을 때 서귀포 시내에는 많은 비가 내렸단다. 당시 서귀포자연휴양림에서 캠핑했던 사람은 텐트에 비가 스며들 정도였다고 이야기해 준다. 이와는 달리 제주시내에는 날씨가 아주 맑았단다. 당시 한라생태숲과 교래 자연휴양림을 다녀온 사람은 햇빛이 매우 강했고, 날씨까지 무더워 무척 힘들었고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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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을 다녀왔다는 뿌듯함과 먼진 풍경을 더 보고 싶어 하는 아쉬움을 남겨둔 채 하산을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은 가뿐했다. 뒤늦게 올라오는 등산객이 많아 일부 등산로는 붐비기까지 했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 후 사라오름을 찾았다. 사라오름은 해발 1,324m에 커다란 호수를 품고 있어 경치가 멋있고, 백록담과 서귀포 시내까지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백록담을 다녀오면서도 이곳은 많은 사람이 지나쳐 버리곤 한다. 백록담을 다녀오면서 지쳐 있는 데다가 사라오름 분기점에서 500미터 정도 다시 올라가야 하므로 이해는 된다. 아들도 사라오름이 높지 않으냐고 자꾸 물어본다. 내심 가기 싫은 모습이다. 조금만 올라가면 된다고 설득해서 도착했다. 분화구를 직접 들어가 볼 수 있고, 작은 호수처럼 물이 가득 차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만족해했다.

20210807_105942.jpg 주) 사라오름 분화구 내 물이 가득한 풍경
20210807_110701.jpg 주) 사라오름 분화구 건너편에 조성된 전망대

사라오름을 다녀온 후 기나긴 하산길이 이어졌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숲길이다. 속밭 대피소를 지났는데도 여전히 4km를 더 내려가야 한다는 푯말을 보고서는 아들이 힘들어했다. 성판악탐방안내소에 도착하니 13시 20분이었다. 총 8시간 20분이 소요되었다. 그렇게 힘들었어도 3년이 지난 지금도 백록담을 다녀왔다는데 대해 뿌듯해하고 있다.




[ 울긋불긋 예쁜 단풍을 기대한 가을산행(10.03.) ]


금요일 밤늦게 한라산탐방예약시스템에 접속했다. 토요일은 이미 1,000명이 예약완료 되었고, 일요일은 겨우 1명이 남아 있었다. 그 하나의 행운을 예약했다. 수도권에 거주하면 휴일 제주도를 오가는 비행기 예약이 어렵기 때문에 최소한 한 두 달 전에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워야 한다. 게다가 폭설이나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한라산 입산을 통제하는 경우도 있어서 등반시기를 잡는 것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참고로 제주도에서 화창한 날씨가 많은 달은 10월에서 11월 사이이다.


새벽에 일어나 사과, 커피, 물을 준비하고, 아침도 챙겨 먹은 후 5시 30분에 성판악탐방안내소에 도착했다. 새벽인데도 주차장은 이미 만석에 가까웠다. 겨우겨우 빈 곳을 찾아 주차한 후, 5시 40분에 등반을 시작했다. 참고로 성판악탐방안내소 주차장은 80대 정도 주차할 수 있다. 대부분 새벽부터 만석이기 때문에 입산 시작시간 이전에 미리 도착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516 도로변에 주차가 가능했었는데, 지금은 과태료를 부과한다. 이곳에 주차하지 못했다면 2~3km 아래에 조성된 대체 주차장에 주차한 후 택시를 타고 오는 방법도 있다.


성판악코스의 등산로는 자연보호를 위해 대부분 야자매트가 깔려있거나 나무계단으로 잘 조성되어 있다. 등산로 양옆으로는 고도에 따라 아열대식물, 온대식물, 냉대식물 등 1,800여 종의 나무와 식물이 자라고 있고, 나무 아래로는 조릿대가 분포하고 있다. 제주시에 따르면 조릿대는 한라산 국립공원 면적의 95%에 퍼져있고, 해발 1,850미터에서도 자란다고 한다. 조릿대는 산철쭉, 털진달래의 생육과 번식을 어렵게 하는 등 애물단지로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폭우나 폭설로 인한 산사태 예방과 토사 유출을 막아주고, 탄소 저장효과도 있다고 한다.

20211003_064151.jpg 주) 성판악코스 : 성판악탐방안내소에서 속밭 대피소로 이어지는 등산로


성판악탐방안내소부터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등산로가 숲으로 우거져 있다. 그래서 다소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이후부터는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특히 안개 낀 날 중산간 지대에 끝없이 펼쳐지는 오름 풍경은 이국적이다. 낮게 깔린 안개 사이로 크고 작은 오름들이 솟아올라있다.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아련하게 보인다.


인생도 안개 낀 숲처럼, 처음에는 가고자 하는 방향이 보일 듯 보일 듯 하지만...

한걸음 다가가 보면 때론 더 멀어지고, 더 한걸음 걸어가면 때론 방향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어느 때는 이게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걷고 걸으면서 그 속에서 나름의 즐거움과 행복을 찾을 수도 있다

하나의 오름에 도착하면 '벌써 도착했네!, 이 오름은 분화구가 예쁘네!' , 다른 오름을 만나게 되면 '이 오름은 한라산을 닮았네!', 또 다른 오름을 발견하면 '볼품은 없어 보이지만 다른 오름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결국은 드넓은 제주바다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멋진 풍경을 바라보면서 인생이 이렇지 않나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20211003_081245.jpg 주)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오름군


이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 중의 하나가 구상나무 군락이다. 구상나무는 한국 고유종으로 해발 1,400미터 이상에서 자라고, 한라산이 세계 최대 군락지이라고 한다. 구상이라는 말도 바다의 성게라는 의미의 제주어 '쿠살'에서 비롯되었는데, 나뭇잎이 성게 가시와 유사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024년 9월 22일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한라산의 구상나무는 1920년대 아비에스 코레아나(Abies Korwana)라고 명명되어 외국에 소개된 이후 90종 이상으로 개량되었고, 크리스마스용 트리로 애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구 온난화 등의 영향으로 인해 정작 한라산에는 구상나무 숲이 최근 100년간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면 이러한 구상나무 숲이 펼쳐진다. 여름의 끝자락이면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라 대부분의 나무는 짙은 녹색을 띠고 있다. 그 사이에서 뼈대만 남은 구상나무가 더욱 눈에 띈다. 한편으로는 쓸쓸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론 우람한 자태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느껴진다.


10월 초에 한라산 백록담을 내려다보면 '이제 가을이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름까지는 연녹색을 띠고 있었던 백록담 주위의 수풀이 이제는 갈색으로 변모해 있었다.


가을에 한라산을 찾는 사람은 예쁜 단풍을 기대하곤 한다. 하지만 설악산이나 내장산에서 볼 수 있는 예쁜 단풍을 보기가 어렵다. 밤낮의 기온차가 클수록 단풍이 곱게 물드는데 제주도는 기온 변화가 크지 않다. 그나마 천아계곡이 단풍명소인데 그 규모가 크지 않다.


백록담은 동서 길이가 600m이고, 둘레가 3km나 되는 큰 규모의 분화구이다. 그런데도 내게는 아담하게 보인다. 그리고 하트 모양으로 담겨있는 물을 바라보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백록담은 흰 노루가 물을 마시는 연못이라는 의미인데, 인적이 드문 날에는 노루가 그곳까지 내려가 물을 마시고 간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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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을 찾다 보면 등산로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때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는 산악 마라톤이라도 하듯 뛰어올라기도 하고, 어떤 이는 등산로에 주저앉아 있기도 한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안녕하세요', '고생하시네요', '얼마 안 남았어요 힘내세요', '조심히 내려가세요' 등 인사를 건네곤 한다. 그런 인사말이 때론 힘이 되고, 때론 정겹게 느껴진다.





[ 겨울의 문을 여는 순백의 눈꽃 세상(11.13.) ]


최근 며칠 제주 시내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때론 우박까지 쏟아지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제주방송에 따르면 한라산 중산간 지대에는 대설이 내렸다고 한다. 특히, 관음사코스 끝자락에 위치한 삼각봉에는 17.1cm의 눈이 쌓였단다. 제주시청에서는 긴급으로 '대설특보, 출퇴근 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세요'라는 문자 메시지가 여러 차례 전송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11월 13일은 구름 한 점 없는 날씨가 되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한라산 등반준비를 했다. 따뜻한 커피를 보온병에 담고, 사과와 단감을 깎아 담았다. 오메기떡, 생수 500ml 3병, 육포 2개도 준비했다. 두꺼운 장갑, 스패치, 아이젠, 무릎 보호대, 스틱도 챙겼다. 등산 배낭이 가득 찼다. 옷은 어떤 것을 입을지 고민 끝에 가을용으로 세 벌을 겹쳐 입기로 했다.


성판악 주차장에는 5시 40분쯤 도착했다. 입산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20~30m나 늘어서 있었다. 입산하기에 앞서 관리사무소 직원이 큰 소리로 주의를 당부한다. ‘한라산은 날씨가 변화무쌍하고, 험준한 산이다.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등산하면 죽을 수도 있는 곳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산행을 포기할 사람은 그만두는 것도 좋다.' 그리곤 묻는다. '포기할 사람 없나?, 정말 포기할 사람 없나?', 여기저기서 '예', '예', '예'라는 대답이 들린다. 그러자 '모두들 무사히 산행 잘하길 바란다, 그리고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이곳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라며 긴장감을 준다.


6시가 되자마자 입장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핸드폰 바코드로 예약자를 확인하고, 발열 체크를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여부도 체크한다. 가끔 바코드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등산객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등산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장시간 걷고 걷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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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라 등산로는 어두웠다. 그래서 다수는 헤드랜턴이나 휴대용 렌턴을 밝혔다. 일부는 핸드폰 후레시 앱을 사용하여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오늘은 홀로 등산하는 사람보다는 5~6명씩 함께 등반하는 그룹이 많다. 이렇게 지인들과 함께 등산하면 서로 의지가 되어 든든하지만, 등산도 운동 겸 취미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불편하기도 하다. 서로 다른 부분을 맞추려다 보니 등산로 초입에서 정체시간이 길어지곤 한다


한라산은 어두운 길을 걸어도 무섭거나 힘들지 않고 평안함을 느끼게 한다. 옛 이름인 영주산에서도 알 수 있듯, 신령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다. 옛날 문헌에 따르면 한라산은 신령스러운 삼신산의 하나이며, 삼신산이란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이다. 삼신산은 도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며, 선계에 살면서 젊음을 유지한 채 장생불사 할 수 있는 곳이란다.


속밭대피소에 도착했다. 날이 밝아 오면서 등산로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기온이 갑자기 높아져서인지 이 지점까지는 지난 며칠간 내렸던 눈이 듬성듬성 보일 뿐이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눈이라 한 움큼 집어보았다. 손 안에서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속밭대피소를 지나 사라오름 분기점에 도달하니 이젠 제법 눈이 쌓여있다. 그래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스틱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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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할 걸음 올라갈수록 쌓인 눈의 높이가 급격히 높아진다. 주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의 두께도 두꺼워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눈으로 만 이루어진 하얀 숲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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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할 걸음 올라갈수록 쌓인 눈의 높이가 급격히 높아진다. 주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의 두께도 두꺼워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눈으로 만 이루어진 하얀 숲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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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흰 눈으로 덮인 동굴이 된다. 이곳이 등산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등산로 양 옆에 설치된 나무휀스와 로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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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백록담으로 올라갈수록 나뭇가지에 쌓인 눈의 양도 점점 많아진다. 고목이 되어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던 구상나무의 나뭇가지에도 눈이 10cm가량 쌓였다. 이때만큼은 죽어있던 고목도 하얀 눈을 잎사귀 삼아 다시 태어난 듯한 우람한 자태를 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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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경 때문에 할 걸음 가서 뒤돌아보고, 또 한걸음 가서 주위를 더 한 번 쳐다본다. 눈을 어디에 두더라도 멋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급경사를 오르고, 등산로가 희미하게 보여 찾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어도 눈이 즐거우니 힘들다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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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올라 간 사람이 남겨놓은 발자국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이제는 등산로 양 옆으로 설치된 나무휀스와 로프 위에도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등산로는 마치 설국열차가 달리는 선로와 같아 보인다. 주위가 온통 하얀 눈에 덮여있고, 선로마저 하얗게 변한 곳에 기다란 기차가 달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기차 안에서 설경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모습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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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백록담에 도착했다. 설경을 감상하면서 느릿느릿 올라왔는데도 정상에는 서너 명 정도밖에 보이 않는다. 이곳 백록담 주변도 설경이 펼쳐진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 백록담'이라고 쓰인 바윗돌 표지석에도 글자만 남겨두고 눈으로 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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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제90호 한라산 백록담'이라고 쓰인 나무 표지석은 눈사람처럼 보인다. 때론 어렵게 어렵게 백록담에 올라와서 기뻐서 두 팔을 높게 쳐들고 만세 부르는 사람 같아 보인다. 때론 너무도 멋있는 설경에 취해 춤추고 있는 듯하다.


백록담을 내려다보았다. 백록담도 눈 세상이다. 백록담을 둘러싼 검은 현무암도 오늘만은 흰옷을 입었다. 백록담 안에 가득 찬 물도 얼음과 눈에 덮여있다.


오늘은 흰 사슴이 물을 먹는 연못이라는 의미의 '백록담'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날이다. 날씨가 맑아서 풍경이 더욱 선명하다. 하늘은 더없이 파랗다. 바람도 불지 않는다. 휴일이면서, 이렇게 좋은 날씨에 더없이 멋있는 설경을 만날 수 있는 날은 일 년 중 몇 번 없다.


폭설이 내리면 대부분 한라산 입산이 통제된다. 며칠이 지나 지인에게 들어보니, 지난 3~4일 대설이 내린 기간에는 입산을 통제했고, 중간중간 대설이 그쳤을 때에도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만 등산로를 개방하였고, 오늘부터 백록담까지 개방하였단다. 그래서 사람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백록담과 주변 풍경을 볼 수 있어 그때 백록담을 올라간 사람은 복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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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판악코스를 통해 백록담을 오른 사람 중 대부분은 이곳에서 머문 후 본래 올라왔던 성판악탐방안내소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곳에서 관음사코스로 10~20분 내려가면 잊지 못할 설경이 또 펼쳐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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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키의 1.5배 정도 되는 주목의 나뭇가지들이 20~30cm의 눈뭉치를 떠 바치고 서 있다.


어떤 것은 커다란 두 귀를 쫑긋 세운 토끼를 닮았다. 산토끼가 나뭇가지에 앉아 '머나먼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빼꼼히 내려다 보는 듯하다.


어떤 것은 엄마가 아장아장 걸을듯한 귀여운 아기를 앉고서 놀아주는 모습이다. 아이는 엄마 품에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듯 보인다.


때론 홀쭉한 눈사람이 만들어지고, 때론 친근한 뚱보 아저씨 모양을 하고 나타난다.


마치 만물상이 모여있는 듯하다. 각양각색의 나무들 사이에서 나 또한 하나의 모양으로 참여해 본다.


이곳에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멋있는 풍경이 이어져 이곳을 쳐다보면 한참 동안 눈을 옮기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곳을 보면 그곳에 눈이 고정되어 금방 시간이 지나 버린다.



관음사코스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올라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네요?, 설경이 너무나 멋있죠?, 오랫동안 제주도에 사는 저도 이런 예쁜 풍경은 한두 번밖에 보지 못했네요?, 구경 잘하고 조심히 내려가세요?'. 바라보는 곳마다 풍경이 아름답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도 정겹기만 하다.



< 백록담의 설경 >


푸른 하늘 아래

하얀 눈꽃들이 솟아오른다

바람이 속삭이는 곳

백록담의 높은 품 안에서 겨울이 말을 건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

산은 숨을 고르고

천상의 기운을 받으며

순백의 옷을 걸친 채 꿈을 꾼다


여기

희고 순결한 고요 속에서

백록담은 겨울의 품에 안겨

신비로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 설경은

단지 눈이 아닌

백록담이 전해주는 겨울의 노래

그 끝없는 고요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

천상의 세계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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