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변화무쌍한 작은 한라산을 체험하다_ 어승생악코스
어승생악은 제주도 368개 오름 중에서 영실에 있는 오백나한(389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오름이다. 어승생악의 높이는 350m이다. 이어 산방산(345m), 군산오름(280m) 순으로 높다. 오백나한은 영실코스에서 볼 수 있는 바위산이지만 탐방이 제한되어 있어 오를 수 없다. 따라서 등산객이 실제로 오를 수 있는 오름 중에서는 어승생악이 가장 높다.
어리목코스 탐방안내소에 주차한 후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가면 어승생악 입구가 나온다. 가끔은 같은 탐방안내소를 이용하는 어리목코스 입구와 혼동되기도 한다.
어승생악은 오름 입구에서 바라보면, 10~20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낮은 산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오르면 그 너머로 평평한 길이 이어지고, 또 한 번 경사진 탐방로를 올라야 비로소 정상에 도달하는 높은 산이다. 다만, 오름 하단에서 정상까지는 나무 계단으로 잘 조성되어 있어 편하게 다녀올만한 곳이기도 하다.
탐방로에는 바위를 뚫고 올라온 나무, 바위를 둘러싼 나무, 바위 위에서 자라는 나무 등 이색적인 나무들이 많다.
어떤 나무는 한글 'ㄷ' 모양을 하고 있다. 사람이 인공적으로 휘게 만든 나무는 많이 보았지만, 자연 상태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4번을 꺾여야 이런 모양이 나올 것인데, 참으로 대견스러운 나무이다.
어떤 나무는 바위를 뚫고, 그 위에서 꼿꼿이 자라고 있다. 자그마한 씨앗이 이곳으로 날아와 단단한 바위를 수십 년간 조금씩 조금씩 뚫고 들어가 싹을 피웠다는데 첫 번째 놀라움이 있다. 그리고 한라산의 거친 날씨까지 이겨내고, 살아남았다는 것이 두 번째 경이로움이다. 그리고 이제는 바위에 몇 그루가 군집까지 이루고 있다는데 놀라게 된다.
또 다른 나무는 커다란 바위를 감싸면서 자라고 있다. 마치 어미가 알을 품고 있는 새와 같다. 폭설과 폭우가 빈번하게 내리는 한라산의 거친 날씨에서 자신이 낳은 알을 보호하는 것 같다. 어미의 이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속에 있는 따스한 어미 품이 마냥 좋을 것이다.
다양한 형태의 나무들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참을 보고 있어도 신기하다. 특히 이곳을 찾는 어린아이들이 좋아한다. 신기해서 때론 만져보기도 하고, 때론 그 앞에 서서 사진도 찍는다.
이런 특이한 모양의 나무들이 산책로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 지루함을 잊게 해 준다. 그리고 어느새 정상에 이르게 된다.
울창한 숲길을 지난 후 정상 인근부터는 사방이 확트여 뷰가 좋다. 가장 먼저 한라산 백록담의 북벽이 눈앞에 나타난다.
정상에 오르면 어생승악 표지석과, 분화구 내 습지, 그리고 일제시설 세워진 군사시설이 있다.
어승생악은 작은 한라산이라고 부른다. 모양도 닮았고, 정상에 분화구가 있으며, 그 안에는 백록담처럼 물이 고여있다. 비가 많이 내린 날에는 분화구 내에 물이 차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주변에 풀이 많이 자라고 있어 습지 형태로 보인다.
오름 정상에서는 제주시내와 제주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추자도, 비양도, 성산 일출봉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정상에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해발 1,169m 어승생악 정상에 1945년에 만들어진 일제 군사시설 토치카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이곳으로 접근하거나 위치를 발견하기 어려우면서 제주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배, 항공기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다. 그래서 2차 대전 말기 공중으로 날아오는 연합군 비행기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벙커는 견고한 시멘트로 지어졌으며, 현재도 내부에 5~6명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참호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 군사시설을 건설하는데 많이 제주도민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시멘트를 짊어지고, 무거운 포와 포탄을 들고서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오면서 많은 사람이 다치기도 했단다. 때마침 이곳에 대해 잘하는 사람이 올라와서 주변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어승생악은 한라산 어리목코스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이곳에서는 한라산 정상의 북벽과 제주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제주시내에서 가깝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다녀올 수 있으며, 겨울에는 설경이 멋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등산로 입구도 해발 970m나 되는 고산지대여서 설경이 멋있다. 뒤를 돌아보면 족은두레왓 정상을 뒤덮은 설졍이 펼쳐진다. 주차장도 숲 속에 있어 사방이 모두 흰 눈에 싸인 풍경을 볼 수 있다.
주차 후 오름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름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 든 노인과 어린아이들도 간혹 보였다. 산책로가 잘 갖추어져 있고, 완만하면서 편도 30분 정도면 다녀올 수 있으므로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는 가족단위 등산객이 다수 있다.
이 오름은 입구에서 능선까지 가파른 길이지만, 능선부터 정상 인근까지는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정상 부근부터 다시 가파른 길이다. 탐방로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나무에서는 쌓인 눈이 녹아 물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탐방로에는 가끔 귀여운 눈사람이 반긴다. 이곳을 찾은 탐방객들이 주먹크기만 한 눈 뭉치로 만든 듯했다. 눈, 코, 잎, 손까지 갖추고 있었고, 조릿대로 손까지 만들어 두었다.
정상인근에 다다르면 어리목코스에서 만날 수 있는 사제비동산, 어리목 계곡, 주변 오름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늘은 백록담 부근의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때론 구름 사이로 햇빛이 새어 나온다. 백록담 주변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고, 그 위로 구름이 몰려들면서 때때로 가느다랗게 빛줄기를 내리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정상에서는 더 넓은 범위의 한라산 풍경이 펼쳐진다. 좌우로 기다랗게 뻗어 내린 한라산 줄기부터 백록담에 이르기까지 한라산 전체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흰 눈 쌓인 한라산 풍경은 언제 보아도 일품인 것 같다.
정상에 있는 군사시설에 들어가 보았다. 전시에는 제주바다로 넘어오는 항공기를 관찰했을 자그마한 구멍으로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흰 눈이 보이고, 연두색의 식물도 보인다. 차가운 시멘트 구멍을 통해 보인 이런 풍경이 정겹게 느껴진다.
어리목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는 어리목코스를 통해 윗세오름과 남벽분기점으로 등반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나는 반대편에 있는 어승생악코스를 택했다.
주차장에서 한라산 방면을 올려다보니 족은두레왓, 어리목계곡, 사제비동산 등 어리목코스 주위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실제로 등반을 하면 더 멋있는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등산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
오름 입구에서는 녹았던 눈이 중턱부터 꽁꽁 얼어 있었고,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상고대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상고대가 눈꽃으로 변했고, 정상 부근에서는 나무 전체가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 주변 풍경이 너무도 멋있다.
때론 하늘을 향해 올려본다. 상고대가 핀 나무들이 어우러져 동굴을 만든다. 때론 등산로 너머의 설경을 본다. 나뭇가지마다 내려앉은 눈이 나뭇잎이 되어 하얀 숲을 이룬다. 한 걸음 걷다가 멈춘다. 또 한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본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차가운 바람이 아주 매섭게 분다. 두꺼운 모자를 둘러쓴 얼굴에 부딪힌다. 살짝 나온 얼굴에도 얼음이 맺힌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잠깐 장갑을 벗은 손도 금방 얼어버릴 것 같다.
이 추위에 '어승생악 정상 해발 1,169m'라고 쓰인 표지석도 얼어있다.
맑은 날에는 제주시내와 제주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얼어 버린 듯하다.
게다가 구름 속에 있는 듯 주변 풍경도 제대로 볼 수 없다. 시야가 10m도 되지 않는 매서운 환경이다.
그래서 겨울산행을 할 때는 아이젠, 스패치, 스틱, 두꺼운 모자와 장갑 등 등산장비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제강점기 건설된 토치카에 내려가 본다. 잠시 매서운 바람을 피할 수 있어서 좋다. 차가운 시멘트 구멍으로 보이는 풍경도 차갑게 보인다.
하산하는 길에 다시 한번 설경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두 번 보아도 여전히 멋있다. 하산한 후 주차장 주변의 풍경도 다시 한번 바라본다. 상고대가 가득 핀 나무들이 줄지어 있어 멋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