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요리하면 바뀌는 집안 분위기

딸들한테 화내고 나서 씁니다 9.

by 소년의 초상

아빠가 집안에서 요리를 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특히 여자들만 있는 집에서 요리를 하다 보니 요새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자주 요리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부쩍 요리를 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러다가 아예 냉장고 담당까지 되는 건 아닌지 괜한 걱정이 든다.


이게 다 아내의 계략이 아닌가 싶다.


몇 주 전부터 아내는 메뉴 짜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며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그래서 결정한 방법이 메뉴를 같이 정하는 것이었다.


함께 달력 앱을 다운로드하여서 서로 메뉴를 공유하기로 했다. 메뉴가 별로거나 추가, 삭제가 필요하면 상대방의 의견도 존중하기로 했다.


이게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매번 아내에게 메뉴 선정의 고통을 주었는데, 함께 고민하다 보니 아내의 고통을 이해하게 됐고 나 역시도 내가 조금이라도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 메뉴 아이디어를 짜내기 시작했다.

서툰 칼질에 베인 엄지손가락. 피가 많이 났다.


그런데, 내가 메뉴를 짜내다 보니 자연스레 주방을 기웃거리게 됐고, 냉장고 안 바로 앞에 오렌지 주스가 있는지도 모르던 내가 냉장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미림과 맛술을 구분하지 못했던 내가 이 둘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숟가락으로 계량을 해가며 프라이팬을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내의 계략이었던 것 같다.


아무튼, 아빠가 주방에서 있는 시간이 늘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들은 퇴근한 엄마와 더 오래 있게 됐다.


아내는 스트레스 없는 얼굴로 퇴근하여 기분 좋게 아이들과 놀아주며 상호 만족감이 더욱 높아진 듯 보였다.


아내가 씻고 나오면 나는 거의 저녁 상을 차려놓는다. 아내는 확실히 데코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나는 세세한 것도 신경 써서 놓는다.


볶음밥은 그냥 덜어놓지 않고 밥그릇으로 모양을 예쁘게 만들어서 내주고, 적당히 먹을 양만 아담하게 줘서 부담 없이 다 먹을 수 있도록 심리적 안정감도 제공하고 있다.


이런 섬세함 때문인지 아내가 정말 좋아한다. 두 딸도 적당히 먹을 만큼만 잘 챙겨 먹고 아빠 최고, 따봉!이라고 외쳐준다.

하원 후 먹는 간식: 두부, 김, 햄계란


사실 스스로 요리에 대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메뉴를 구성하는 것이라든지 다른 곁들일 것을 선택하는 기준이라든 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대충 계량해서 음식을 만들어도 대체적으로 간이 잘 맞다. 딱 알맞아서 아내는 엄청 좋아한다.


첫째와 둘째도 밥에다 닭고기 음식만 먹어도 잘 먹는다.


왜 신은 내게 이런 이상한 능력을 주었을까? 나도 암흑의 요리사 김풍처럼,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림부터 구이, 파스타 등 다양한 음식을 도전하다 보니 이제는 반찬에도 도전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요리보다 반찬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간을 맞추고 볶고 삶고 하는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조만간 콩나물 무침, 시금치 무침, 가지 무침 등 무침류부터 섭렵해 보려고 한다. 유튜브 쇼츠를 보면 계량부터 요리 방법까지 너무 신속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한 번 쓱 보면 바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요리를 하면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주는 아내의 동기부여가 가장 크다. 하지만 말을 잘 못하는 둘째가 내가 만든 요리를 코 박고 흡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큰 행복감을 느낀다.


둘째는 짧은 엄지 손가락으로 엄지 척을 해주며 아빠 최고라고 하는데, 얼마나 기쁘던지. 내가 최강록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이게 요리를 하는 기쁨인가 싶다.


첫째는 안성재 셰프에 빙의되어 맛을 음미한다. 사실 처음에는 아빠 음식이 엄마 것보다 훨씬 맛있다며 칭찬을 해주곤 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먹는 것 같다.


워낙 육식동물이기 때문에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가 들어가야 맛있다고 하는 여성이라서 대충 건강하게 주면 탐탁지 않아 하는 듯하다.


그래도 아빠가 요리했다고, 와서 먹으라고 하면 세 여자가 뛰어 와서 식탁에 앉아 수저를 드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




나는 아마도 요리를 계속하지 않을까 싶다. 빈도는 조금 줄어들 것 같지만 여전히 해주고 싶은 음식들이 남아있다.


아이들이 어리니 고춧가루는 최대한 배제하고 된장 베이스에 일본식 요리를 해주고 싶다.


연쇄조림마처럼 깊은 맛을 주어 밥도둑을 만들어주고 싶다. 곁들이는 음식도 꼭 한 개씩은 해주고 싶다. 어른들은 김치를 먹지만 아이들은 환기할 맛이 없기 대문에 꼭 곁들이는 음식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내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이지만.


자꾸 무궁무진하게 메뉴가 떠오르고, 유튜브 알고리즘에도 셰프들이 나오는 것을 보니 큰일 났다.


일단 오늘 저녁은 고등어를 된장에 조려서 요리를 해봐야겠다. 생선은 잘 먹지 않으려고 하니 짭짤하게 주면 잘 먹을 것 같다. 레몬 슬라이스도 필요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