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썩어갈 듯 말라서 싹이 난 감자에서 새 감자가 주렁주렁 이라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자를 캐 본 나는 호들갑스럽게 땅을 팠다. 싹 틔운 감자를 땅 속에 묻으면서도 알감자 조금이라도 나오면 땡큐고 아니어도 별수 없다는 마음으로 심었는데 땅밖으로 초록잎이 무성하게 올라오더니 땅 밑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다음 주 중에 캐려고 계획을 잡아놨는데 예상보다 장마가 일찍 시작돼서 비가 왕창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린 후 방치하면 감자가 썩는다기에 우리들은 부랴부랴 집합! 명령을 내려 감자를 캐기로 했다.
두근두근! 이거 뭔데 설렌다. 줄기를 쑥~ 잡아 뽑으니 무언가 묵직한 것이 딸려서 올라온다.
'와~ 대박! 이것 봐~ 매달렸어. 웬일이야. 장난 아닌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작은 뱀이라 우겨도 될만한 뚱뚱한 지렁이들이 출몰하는 밭에서 깜짝깜짝 놀라면서도 하나라도 더 캐보겠다고 땅을 열심히 파헤치고 있었다. 겁도 많은 내가. 처음에는 지렁이 보고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감자가 땅 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된다고? 감자가 나온다고? 이 작은 밭에서 생초보가 심은 감자가 된다고?' 감자를 심어놓고 감자가 나온다고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감자 심었는데 감자 나오는 것이. 그 당연한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작은 공깃돌 같은 감자부터 제법 큼직한 감자까지 크기는 중구난방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감자 농사는 이만하면 성공적이었다. 내 기준에는.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불현듯 어릴 때 손등 위를 모래로 덮고 토닥이며 불렀던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니 이 얼마나 이기적인 노랫말인가. 헌 집을 주면서 뻔뻔하게 새집을 내놓으란다. 그런데 지금 내 감자농사가 딱 그 꼴이다.
"감자야 감자야 헌 감자 줄게. 새 감자 다오" 정말로 헌 감자를 줬더니 마법처럼 새 감자가 나왔다. 이기적이어서 미안하긴 한데 새 감자를 내놔줘서 고맙다. 이 대견한 녀석들 동네방네 소문 내서 칭찬해줘야 한다.
(내가 캔 생애 첫 감자)
감자만 얘기하면 다른 작물들이 시샘하니까 기특하게 잘 자라주는 다른 채소들 이야기도 해보자.
당근은 이제 '무농약 햇당근'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는 쇼핑몰에 메인사진으로 걸어도 될 만큼 풍성하고 예뻐졌다. 아직도 자기가 산삼인 줄 알고 다리 뻗치고 특이한 모양 뽐내는 이들도 있지만 청소년기 지나 어른당근 모습을 갖추며 통통해졌다. 글로는 당근 향을 전할 방법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마트에서 수백 개 당근이 쌓여있는 곳을 지나도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향이 당근 하나에서도 난다면 설명이 될까. 향기로는 단연 일등이다.
(농부 직거래라고 쓰여있는 판매처에서 봤던 사진 흉내 중)
호박은 세 가지 종류를 심었는데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탈 없이 타고난 대로 참 잘도 자라난다. 동그라면 동그란 대로 길쭉하면 길쭉한 대로 모두가 예쁘다. 그들의 개성을 존중한다. 다시 말하지만 호박은 못생김의 대명사로 쓰이기엔 너무나 억울하다. 얼마나 맨들하고 예쁜지 모른다.
토마토는 이제 점점 석양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대추토마토를 몇 알 따서 한 손 가득 올려놓으니 행복하다. 행복이 뭐 별 건가? 이런 게 행복이지. 텃밭을 하면서 자주 하게 된 생각이다.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특이한 채소도 있다. '이것은 가지인가? 고추인가?' 싶은 채소다. 적절하게 합의를 보고 지은 이름이 가지 고추이다. 가지색을 띤 고추모양을 가진 채소다. 흔하게 접했던 채소는 아니었지만 텃밭에서 나름 감초 역할을 하고 있다. 유니크한 매력을 가지고 보라색 고추를 만들기 위해 보랏빛 꽃을 피운다.
청양고추, 오이고추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중이다. 수확해서 먹고 다음에 가면 또 내어주는 착한 녀석들이다. 가지도 꽃이 지면서 곧 수확을 해야 할 정도로 잘 자라고 있다. 연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피망도 있다. 좀 더디게 자라는 듯 하긴 하지만 그래도 피망모습을 드러내면서 텃밭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대파도 씩씩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섯 칸 자리 작은 텃밭인데 이렇게 많은 작물들이 예쁜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다. 아참! 상추를 비롯한 쌈채소 소개가 빠졌다. 특이점 없이 늘 잘 자라고 있으니 칭찬과 자랑을 놓칠 뻔했지만 정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해서 잎을 만들어낸다. 잔뜩 뜯어가는 내가 밉지도 않은가 보다. 덕분에 우리 집 식탁에는 늘 쌈채소가 한가득이다. 생초보가 하는 농사일이니 시행착오도 있고 모양으로만 보면 일등급 상품은 아니지만 나에게 주는 가치만으로만 보면 특등품이다. 올해 내가 시도한 일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잘한 일 중 하나이다.
그만 자랑해야지. 자랑이 지나치면 질투를 낳고 질투는 화를 부른다 했으니 오늘의 자랑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 또 다른 자랑거리로 나타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