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연재하는 날이다. 보통은 사진도 편집하고 초고도 미리 써놓은 뒤 다듬어서 올리는데 오늘은 그냥 당일에 뭘 쓸까를 고민 중이다. 지난 화에 자랑을 너무 늘어지게 한 탓일까? 아니면 내 기운이 밝지 않은 탓일까? 글 쓰는 힘이 떨어졌다. 내 탓이지 뭐. 핑계를 대자면 이번주에는 생각할 것들이 너무 많아 용량초과로 텃밭 글감을 넣을 자리가 없었다. 편안하게 글 쓰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를 새삼 느낀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처럼 기쁨이가 본부를 못 찾고 어딘가 캄캄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영화와 다르게 슬픔이는 두고 혼자 나가버려서 텃밭 관리자인 내 상태가 약간 고장 났다. (인사이드 아웃을 보신 분만 이해할 이야기) 아무튼 인사이드에서 대체 버튼을 어떻게 누르는 건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인데 일단 그냥 앉았다. 뭐 그럴만한 제반사정들이 깔리고 널려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풀어보기로 하고 일단 컴퓨터를 켠다. 부팅시간을 기다리며 아이스 카페라테 한잔을 만들어 방으로 가지고 들어와 집필실 분위기를 연출한다.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슬펐던 날에도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던 날에도 글을 쓰다가 위안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본다. '깜박깜박' 심박동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꺼짐과 켜짐을 반복한다. 멍하니 바라보다 한 줄을 쓴다. 떠오르는 대로. 뭘 쓰지? 뭘 쓸까? 일단 텃밭연재니까 텃밭소식을 전하고 넋두리던 한풀이던 해보자.
텃밭은 여전히 잘 있다. 당근과 감자를 뽑아낸 자리에 삼동파와 고구마를 심었고 또 무언가 수확하는 날을 기다린다. 어떤 날은 식탁 위에 차려진 반찬의 대부분이 일명 '이쁜이 마트'에서 공수해 온 재료들로 가득 차기도 했다. 띄어쓰기 잘못하면 대기업 마트로 오래 받을 수 있으니 확실하게 띄어준다. 다른 밭에서는 장마가 들이닥칠까 봐 여기저기 물길을 트는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고 또 한편에서는 큰 비가 내리기 전 수확할 것들을 정리하느라 서두르는 사람들도 보인다. 다들 그들만의 이유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초록색일 때 따온 토마토들이 뒷베란다에서 익어가고 하나씩 잘 익은 놈을 골라 샐러드에 토핑으로 올리면서 뿌듯하다. 뿌듯한 거 좀 더 자주 하면서 살면 어떨까? 단 한 번도 귀농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난 도시가 좋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익숙하고 편한 사람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시골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 할 때 손사래를 치며 '갈 거면 당신 당신 혼자 내려가요'라 했던 엄마가 당연하다 생각했고 '굳이 왜? 편리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찾아가지'라고 생각했다. 텃밭을 시작하고부터인지, 불혹과 지천명 사이에서 방황 중이어서 인지, 나의 인사이드 오류 때문인지 점점 아빠의 말이 꼭 이상한 제안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늦었지만 한 번도 호응해주지 못했던 그때의 아빠에게 미안하다. 물론 농촌생활이 낭만과 뿌듯함, 설렘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는 철딱서니 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라도 평온하고 싶을 뿐이다. 사실은 영원히. 텃밭에 가면 평온했던 좋은 기억이 있어 문득 해본 생각이다. 3도 4촌을 해볼까? 3일은 도시에서 살고 4일은 시골 어딘가 내려가서 사는 거다. 도시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겠고 촌에서 자연이 주는 바람에 편하게 안기고 싶기도 하니 이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더 명확하게 하자면 골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2골 3도 2촌 정도 하면 아주 밸런스가 잘 맞지 않을까? 둘째까지 대학을 보내면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겠다. 이틀 골프 치고 삼일 도시에서 살고 남은 이틀 촌에서 텃밭을 가꾸는 삶. 상상만으로 잠시 잠깐 행복해진다. 계획한 대로 이루며 살려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돌아가야 한다. 온 세상과 우주의 기운이 나를 위해 움직여야 하고픈 것들을 착오 없이 하면서 살 수 있다.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살아보니, 그냥 50년 가까이 살아보니 계획대로 살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나이기도 하지만 얽혀사는 주변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뜻에서 계획대로 산다는 건 나와 내 주변이 모두 평온하고 무탈하다는 방증이다. 계획을 세워놓고 얽힌 누군가에 의해 수정하거나 불발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더불어 살아서 좋은 세상이기도 하지만 더불어서 힘들기도 하다.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삶은 '절대평온'이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상태. 한때는 도파민 중독이었는데 이제는 자극보다 안정이 좋다. 걸리적거림이나 서걱거림이 없는 인간관계. 죽음을 앞서 걱정하지 않는 삶. 남의 아픔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무딘 감정. 또 불가능을 얘기하고 있다. 걸리적거리는 인간관계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음을 두려워하고 오지랖을 떨며 남까지 걱정하느라 여념이 없는 나. 텃밭이고 나발이고 정신부터 좀 차려야겠다. 다음화에서는 제정신이기를.
p/s 오늘도 굿을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나쁜 기운이 싹 나가기를 바라면서. 무꾸리는 사양한다. 길흉을 점치고 싶지는 않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