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왔다. 오랜만에 온건 아니다. 텃밭에 관한 글을 오랜만에 쓰는 것이지 텃밭은 자주 왔다.피부는소중하니까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음악부터 틀고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는다. 오늘의 노동요는 성시경으로 정했다. 유튜브 뮤직을 틀어놓고 감성발라드를 흥얼거리며 조리개에 물을 채운다. 조리개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가 참 듣기 좋다. 무언가 채워지는 힘찬 소리랄까? 가을아침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밭에 물을 주고 정자에 앉아 나도 물한 모금을 마신다. 휴대폰을 열고 어젯밤 써놓은 날아다니는 문장과 단어를 재조합한다. 텃밭정자에서의 글쓰기. 불어오는 바람과 흔들리는 풀들 사이에서의 글쓰기는 생각을 말랑하게 만드는 좋은 선택이다.텃밭연재를 호기롭게 시작하며미약한 시작을 뒤집는 창대한 끝을 기다렸는데 나의 게으름으로 방학식 글을 써놓고 개학도 미룬 채 미적대다가 이제야 글을 쓴다. 운동도 글쓰기도 사는 일도 꾸준함이 참 어려운 과제이다. 처음에 한번 놓칠 땐 '어쩌지'하며 불편하다 두 번세 번 누락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동력을 잃어가 엔진 꺼진 자동차처럼 멈춰 선다. 게으름도 늘 나름의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핑계에 불과할 뿐. 다시 심기일전하여 글감을 실은 동력 잃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본다.
패션계만 S/S, F/W가 있는 것은 아니다.농사도 이제 F/W시즌이 시작되었다.
텃밭 S/S시즌의 주력은 상추와 오이, 고추, 호박이었다면 F/W의 트렌드는 김장이다. 올가을 유행예감은 총각무,김장무, 배추등 김장에 필요한 것들이다. 컬러감은 그린에 화이트가 살짝 그러데이션 되어서 은근한 도도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압도적으로 유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매끈한 무에 달린 반전매력을 가진 거친 무청도 다방면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봄에만 유행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당근도 일부 유행이 지속되어 화사함을 더할 것이다. 꾸준한 인기아이템 대파의 인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고추와 가지, 호박은자기 임무를 지나치게 열심히 해주었다. 나 빼고 모두 부지런했다. 기대 없었던참외도 노랗게 예쁜 스트라이프 옷을 입고 나타나 여름시즌 피날레를 장식했다.
<어설픈 초보 농부에게 기꺼이 이것저것 내어준 고마운 녀석들>
봄, 여름 시즌을 풍성하게 장식했던 작물들은 이제 서서히 가을시즌에 맞는 이들에게 땅을 내어줄 시기가 된 것이다. 그에 맞춰 나의 농사 F/W는 시작되었다. 여름동안 밭은 무성한 풀밭이 되었다. 폭염에도 잡풀은 지치지도 않고 자라났다.이제는 재정비를 하고 가을농사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 이쁜이 텃밭 동지들이 모여 잡초 제거도 하고 땅을 갈아엎어 비료도 듬뿍 주고 가을을 준비했다.
F/W에 어울리는 씨앗을 뿌리고 가을 상추, 파, 배추도 몇 개 심었다. 딱딱한 씨앗을 깨부수고 또다시 흙더미를 밀어내고 나와 싹을 틔우는 건 얘네들도 힘든 일인가 보다. 일부는 발아가 잘 되었고 또 어떤 것들은 깜깜무소식이다. 어렵다. 농사. 발아가 안된 곳에 다시 씨앗을 추가하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작은 밭이지만 신경 써줘야 하는 것들이 많다. 늘 들여다보고 아껴주고 사랑을 주어야 튼튼하게 자라나는 것이 사람과 닮았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오늘 이리저리 발자국소리 내며 돌아다녔으니 잘 들었을 거라 믿는다.
물을 주고 정자에 앉아 몇 글자 생각나는 대로 적다 멍하니 우리 밭과 다른 밭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가끔 나비가 날아다니기도 하고 새들이 밭을 넘보며 기웃거린다. 평온하다.
수확을 위한 애씀과 기다림. 기다림 속에 여유와 평온. 결국 해냄.
농사도 일상도 '결국 해냄!'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내 어깨를 토닥이며.
갈 때마다 조금씩 자라면서 힘을 내고 있는 이파리가 여전히 대견하고 기특하다. 애쓰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 나의 맘 씀과 너의 애씀이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기를 바라며 f/w시즌이 흥행하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