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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Nov 30. 2023

밥 팔던 사람에서 집 파는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공인중개사

 밥 팔던 사람에서 집 파는 사람이 되었다.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하고 정해진 수순대로 난 영양사가 되었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친구들 중에 전공을 살린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길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찾아왔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직장생활보다 훨씬 힘든 시간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하고 싶은 것 많고 신랑표현에 의하면 뭐라도 배워야하는 학원병을 가지고 살던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엉거주춤 일어나 지겹도록 미역국을 먹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아니다!’

남들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처럼 대해주었지만 괜히 눈물이 나고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없이 나를 괴롭혔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산후우울증이 아니었다 싶다.     

‘무어라도 해야겠다, 목표가 없는 삶은 더 이상 안 되겠어’

그러다 우연찮게 공인중개사 광고 전단지를 보게 되었던 나는 이거다 싶었다. -그때 본 것이 사법시험 광고였으면 또 다른 삶을 살았을라나-     

  그때의 부동산은 장기판이 놓여있는 할아버지들 사랑방인 복덕방이라는 이미지에서 자격증을 가진 전문인의 운영으로 전환이 시작되는 뭐 그러한 시기였다. 출산한 지 한 달 만에 육아는 신랑과 엄마의 몫으로 던져놓고 뭐라도 목표 있는 사람이 되어보겠다며 퉁퉁 불은 몸으로 학원을 찾아가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몇 시간씩 강의를 들었다. 그때 내 나이가 28살이었으니 참으로 용기가 가상하다. 어려서 철없이 도전했지만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철이 든다는 건 가끔은 용기가 줄어드는 어른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


처음 보는 민법 책을 사들고 교실 문을 열었을 때 강의실을 가득 메운 어르신들을 보고 살짝 놀랐지만 이제 뭐 어쩔 수 없었다. 가족들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난리를 쳐가며 찾아온 학원이었기에 창피하게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는 막내도 나쁘지는 않았고, 그들은 날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처럼 대하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시간이 없으니 1차만 준비해라, 스터디 그룹에 들어와라, 도시락을 싸와서 수업 후 독서실에 가라” 등등.

애정 어린 말이긴 했으나 약간 꼰대 잔소리 같아서 대답만 하고 크게 새겨듣지는 않았다.

혹여나 나를 안타까운 사연 있는 사람으로 볼까봐 출산한지 1달 되었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떨어지면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꼭 공인중개사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벼랑 끝 에 선 심정으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저 합격이 필요했다. 왜 그렇게 악착같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는 않지만 그땐 그랬다. 시부모님, 친정엄마. 신랑, 게다가 갓 태어난 우리 아기까지 모두에게 ‘거봐, 해냈잖아’ 이런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개월 만에 시험을 치르게 되었고 역대급 어려운 난이도에 합격률이 1%대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합격!!! 

그 시험에서 학원생 중 유일하게 내가 합격했고 뉴스에서 15회 공인중개사 난이도에 대해서 연일 떠들어대니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씻음과 동시에 우쭐거리는 마음까지 들었다. 같이 준비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동기생-나이는 한참 위지만 같은 해에 시험을 준비했으니 동기들이다-들은 학원에서 제공한 커다란 버스를 타고 정부청사 앞으로 데모를 하러 매일 나가고 뉴스에서는 난이도조절 실패라며 전문가 패널까지 불러 토론을 벌였다. 결국 거센 항의를 견디지 못하고 유례없는 재시험이 시행되어 이듬해 30%가 넘는 합격자를 보상하듯 배출하였다. 그때 합격생을 15회, 15-1회로 분류해서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싫겠지만 난 그렇게라도 차별화를 두고 싶은 15회 합격생이 되었다. 육아휴직 기간 중에 성취감을 위해 도전 했으니 이제 되었다 했어야 하는데 사람마음이 그렇지가 않았다.


난 이제 밥은 그만 팔고 싶어졌다. 사직서를 내고 집을 팔기로 결심했다. 주변에서 모두 날더러 미쳤다고 했으며 신랑은 결혼 후 처음으로 일주일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결국 늘 그렇듯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진행했다. 그렇게 등기부등본도 한번 본 적 없는 내가 자격증 하나 믿고 29살에 부동산을 개업하고 2번째 직업으로 집을 팔기 시작했다. 외관에서 보이는 집의 다양성만큼이나 집은 각각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다. 집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사연도 함께 나에게 제공하며 적절하고 적당한 거래가 이뤄지길 바란다. 아이가 명문대학에 진학했다며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자랑을 하는 사람, 남편이 승진해서 발령을 받아 이쪽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윗집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 못살겠다며 집을 구해달라는 사람, 시부모님과 분가를 하게 되었다며 들뜬 새댁의 이야기까지. 


밥을 팔며 나의 20대가 지나갔고 집을 팔며 30대가 흘러가서 이제는 40을 훌쩍 넘은 나이가 되어 육아가 다 끝나면 뭘 하며 놀까를 궁리하는 나에게 신랑이 웃으며 농담조로 말한다.


“밥장사, 집장사 했으니 옷장사만 하면 의식주 완전 정복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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