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한 달 살기
2023년 1월 23일 월요일
싱가포르 한 달 살기 17일차
새벽부터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에 이른 잠을 깨고 하루를 시작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오는데 잠시 내리고 그치는 스콜이 아니라
꼭 우리나라 장마 기간처럼 비가 내리는 느낌이다.
어제는 키즈카페에 가서 놀았지만
오늘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비가 와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그러면 좋은 추억이 된다고 말해주는데..
언제 이렇게 컸나 싶으면서도 여행이 가르쳐 준 여유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들의 말이 정말 기특하게 들렸다.
엄마, 비가 와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일단은 따뜻하고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숙소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며 아들과 그림 그리기를 했다.
요즘 한참 빠져있는 게임인 로블록스 베드 워즈 캐릭터 따라 그리는 거에 재미가 붙은 아들은
똑같이 그리려고 엄청 노력을 하고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본인이 만족스러워하는 결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오후는 어찌 보내나 구글맵으로 이리저리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는데
마리나베이 샌즈 쪽에 레드닷 디자인 뮤지엄 (Red Dot Museum)이 있어서 가보기로 했다.
비가 주르륵 주르륵 더 많이 쏟아지긴 했지만 우산 쓰고 버스 타고 가보기로 했다.
하필 우리가 걸어서 이동할 때 비가 더 많이 내려서 살짝 힘들었지만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다가 베이 프런트 광장에 카니발이 설치되어 있는 걸 보았다.
뮤지엄 갔다가 혹시라도 비가 그치면 가보자 하고 우선 뮤지엄으로 급히 들어갔다.
입장료는 10싱달러인데 비도 오고 손님도 없어서 그런가 직원이 아이 요금은 안 받겠다며 그냥 들어가라고 해줘서 고마웠다.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제품들은 디자인이 독특하면서도 미학적이고 절제된 디자인으로 더 고급져 보이는 게 특징인 것 같다. 단순화하고 최소화하면서도 오히려 기능을 살리고 디자인도 돋보이게 하는 제품들을 보면서 감탄을 했다.
생각보다 뮤지엄 규모가 작아서 금방 둘러보고 베이 프런트 쪽으로 크게 나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서있는데
아들이 사람들이 우산 안 쓰고 걸어가는 것 같다며 우리도 빨리 나가보자고 했다.
다행히 비가 좀 그쳤고 카니발 쪽으로 가보니 사람들이 꽤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비가 막 그친 상태라 카니발 직원들은 놀이 기구 물기를 닦는데 여념이 없었는데
살짝 둘러만 봐도 놀이 기구들이 아주 대단하거나 다양하지는 않고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즐기기에 딱 알맞은 수준으로 보였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놀이 기구는 무서워서 못 탈 것 같다는 아들은 여기가 자기한테 딱 맞는 곳이라며
무엇을 먼저 타볼 것인지 돌아보며 신중히 고민을 했다. 내가 보기에는 시골 장터에서나 볼 법한 아담한 놀이 기구들이었는데 아들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놀이동산이었던 것이다.
아들은 고민 끝에 회전목마, 워터 보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야 전진/후진이 되는 물 위의 수동 놀이 기구), 범퍼카 세 개를 골랐다.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된 회전목마는 비교적 짧은 회전 반경으로 꽤 오래 돌아갔고,
워터 보트는 양손으로 손잡이를 돌려야 작동되는 수동 놀이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한테 인가가 제일 많았다. 아들도 팔이 아프다가도 하면서도 두 번이나 더 탔고 직원 아저씨가 기다리고 기다려주다가 너무 오래 타니 내리라고 할 때까지 양팔 돌리며 탔으니 힘듦과 재미가 비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범퍼카는 나랑 같이 탔는데 속도가 한국에서 타던 범퍼카 속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페달을 살짝만 밟아도 앞으로 훅 나가는데 꽤 스릴 있게 재미있게 탈 수 있었다. 단, 아들은 급하게 내지르는 속도가 무서웠는지 페달 밟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페달을 밟지 않으면 앞으로 안 나가는데 그럼 어쩌나...
1시간 넘게 카니발에 있으며 노는데 또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지하철을 타러 가면서 아들은 정말 재미있었다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예상치 못하게 카니발을 마주치게 되어서 그 기쁨이 컸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하루 종일 비만 와서 재밌는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그래도 빗속을 뚫고 외출을 하고 잠시 그친 비 덕분에 재밌는 놀이 기구를 탈 수 있어서 기뻤다고 했다.
아들이 이렇게 좋아해 주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좋으면 나는 다 좋다. 그게 엄마니까.
숙소에 돌아와서는 얼마 전에 서울에서도 보고 여기 와서도 한 번 봤던 디즈니 영화 'Strange World'를 다시 보았다. 아들은 이 영화가 좋다고 한다.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도 좋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 좋아서라고 하는데,
어른인 내가 봐도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이 든다.
자연과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고 장애를 가진 이와 소수 집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스토리가 있어서 아이들에게도 어른이게도 귀감이 되는 영화인 것 같다.
영화 내용 중, 위기를 헤쳐가는 와중에 주인공의 엄마가 아들 이든에게 다른 사람의 말에 동요되지 않고 너만의 길을 찾아가길 바란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영화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세대 간에 걸쳐 있는 갈등인데 특히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정해놓고 자식을 위한 거라며 본인의 생각을 자식에게 종용하는 점에 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랬고, 아버지는 그게 싫어서 할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이 아들에게 그러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는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했다.
다 널 위해서야, 엄마 아빠가 해봐서 알아, 넌 아직 어려서 잘 몰라...라는 말들로 아이의 미래와 꿈을 마음대로 정하는 우려를 범하기도 한다.
나도 어쩌면 지금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아들이 어려서 지금이야 내가 하는 말을 다 듣고 따라주지만 조금만 더 크고 사춘기에 접어들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럴 때 영화 속 이든의 엄마처럼 아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고 끝에는 본인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고 싶다.
아들의 추천으로 세 번이나 본 영화인데
일기를 쓰다 보니 혹시 아들은 내가 지금 느낀 바를 바라고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