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외로울 땐 구인란을 살펴요

by 미는 여자


경력 단절에 나이 많은 편.


제 열등한 조건에도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다름 아닌 외로움 때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제 손을 꼭 잡아주실는지 아니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다고 저를 나무라실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어느 날이었어요. 아이를 등교시키고 집을 청소하다가 우연히 아이가 숨겨놓은 학습지 뭉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매번 학습지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풀지 않고 조금씩 덜어내어 감춰 놓은 것이었는데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되어 보였어요. 학습지 뭉치를 보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더군요. 전날 숙제를 빨리 끝냈다고 자랑하던 아이 얼굴이 선연했지요. 어려운 문제도 곧잘 푸는 아이가 기특해서 삼겹살을 뛰어가 사 와서는 다 차려놓은 밥상 위에 뒤늦게 올려놓았던 것도 생각났고요. 그러자 손이 다 떨리더군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간식을 차려주고 오물거리는 그 입을 바라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입으로 또 어떤 거짓말을 했을까. 아이가 일과를 마치고 학원에서 돌아오기까지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습니다.

“이게 뭐니?”

마침내 집에 돌아온 아이 앞에 종이 뭉치를 내밀었습니다. 아이 얼굴이 금세 붉어졌어요.

“그동안 이런 식으로 숙제한 거였어?”

아이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어요.

“네가 거짓말한단 생각은 하진 못했어. 이거 말고 또 다른 건 없어? 솔직하게 얘기해.”

순간 아이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더군요.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아이의 속마음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시 물을게. 학습지 말고 엄마를 속인 게 또 있어?”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종이 뭉치를 탁탁 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대답이 없었어요. 표정은 굳어 있었고요.

“왜 그랬어?”

다그쳐도 말 한마디가 없어서 저는 애가 닳았지요. 반성하는 기색은커녕 오히려 화가 난 듯 보이는 아이의 표정 때문에 갈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냐고 묻잖아. 어?”

아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어요. 답답해서 한숨이 나왔어요. 그제야 아이가 새초롬한 얼굴로 이러더군요.

“하기 싫어서 그랬어요.”

“뭐? 왜 하기 싫은데?”

“하기 싫으니까 하기 싫은 거죠.”

마치 억울한 누명이라도 쓴 것처럼 구는 아이를 참고 봐줄 수가 없었어요. 바로 큰소리가 나갔습니다.

“하기 싫다고 이런 식으로 엄마를 속여?”

“엄마한테 하기 싫다고 했으면 하지 말라고 하셨을 거예요?”

정말 맹랑하다고, 너는 누구를 닮았느냐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앞으로 제 방엔 들어가지 마세요.”


이 말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것 같아요. 어쩌면 제가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는지도 몰라요.

“너한테 들어가는 학습지 비용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돈 아까운 줄도 모르고 이게 어디서….”

쥐어박으려는 제 손을 아이가 턱 하니 잡더니 저를 매섭게 노려보더군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 돈 엄마가 버는 거 아니잖아요. 엄마는 일도 안 하면서.”

가슴이 움찔했습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데 그게 뭔지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너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화살을 돌리고 싶은지, 집안일이란 원래 이타적인 일이라고 주부 입장에서 변론을 하고 싶은지, 그도 아니면 부모를 속인 잘못에 대한 훈육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습니다. 돈의 잣대를 들이댄 게 저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데도 저는 억울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언제 들어왔는지 Y가 옆에서 이 모습을 다 보고 있었더군요. 그를 보자 눈물이 날 것 같았어요. 제 억울함을 풀어줄 완벽한 타이밍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Y는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제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요. 그러고는 방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문을 소리 나게 닫아버렸어요. 왠지 방문도 잠가버렸을 것 같았지요.

아이도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한동안 저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창가에는 달이 떠올라 있었고요.


저는 지금에서야 외로움에 사로잡힌 그때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자기 마음도 몰라주고 문제집만 들이미는 엄마 때문에 외로웠던 아이와, 바쁜 회삿일로 홀로 분투했던 Y와, 독박 육아로 지친 저 자신까지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안아주지 못했어요. 한 발 떨어지면 보이는 것들이 있지요. 시간이 제게 가르쳐 준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외롭지 않은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외로움이 제 어깨 위로 날아오더군요. 외로움이란 그런 것이지요. 죽을 때까지 따라다녀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외로움에 사로잡혀 ‘왜 그랬어?’ 살을 에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외로울 땐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요. 그리고 약을 먹듯이 가만히 읊조립니다.

‘당신!’

당신이란 말은 얼마나 친근한지.

‘우리!’

우리란 말은 얼마나 근사한지.


시간이 나거든 우리 함께 구인란을 클릭해요. 그곳은 외로운 사람들의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다툼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들끓고 흘러넘쳐서 에너지가 가득한 곳이지요. 갈대숲 같은 곳.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곳. 죽지 않는 곳. 가슴검은도요새가 숨어서 당신을 지켜보는 곳.*

그곳에서 우리 같이 곁불을 쬐어요. 달빛이 흐르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만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는 손을 흔들어 인사할게요. “여기요, 여기. 나 여기 있어요!”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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