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 스티커판에 포도 알을 채울 때면 뿌듯했던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그런데 포도 스티커를 주는 말 잘 듣는 법은 수도 없이 배웠는데, 거절하는 방법은 배워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도덕이나 사회 수업, 교양시간에 배운 인간관계론에서도 그랬다. 집에서는 더욱더 그랬다.
아마도 ‘처세는 배우는 것이 아닌 눈치의 영역인가’ 싶었다. 마음속 칭찬 포도 스티커가 지금도 습관처럼 채워지고 있는 건지, 거절을 한다는 건 스티커를 받을 수 없는 잘못된 행동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익숙하지 않은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부담부터 밀려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 나에게 조금 부담이 되더라도 들어주던 부탁 때문에, 내 할 일이 뒷전이 되는 상태가 되기 일쑤였다. 또 반복되는 부탁을 들어주다 보면 자연스레 짜증이 나고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 눈치껏 우아하고 품위 있게 거절하는 사람을 볼 때면 존경스러웠다. 더군다나 나보다 한참 아래인 MZ 세대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X세대인 나나 윗세대들에게는 거절이 참 어렵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기에,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Chat GPT에게 ‘거절의 기술’이라고 물었다.
첫째. 즉각적인 반응 피하기
(‘스케줄표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둘째. 감사와 인정
( 협상의 의지를 표한다.)
셋째. 명확하고 간결하게 거절
(이야기가 길면 상대방의 반론할 여지를 제공하게 된다)
넷째. 진솔한 이유 제시
(‘현재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다섯째. 대안 또는 제안
(‘다른 방법으로 도울 수 있을지 한번 찾아볼게요.’)
여섯째. 긍정적인 마무리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일곱째. 연습과 준비
(연습을 해두면 당황하지 않는다.)
학습을 끝내고 실전에 적용해 봤다.
너스레 부탁을 잘하는 직장 동료가 또! 시간 교체를 부탁해 왔다. 특별한 일이 없어서 또! 그냥 바꿔 줄까 하다가, 이참에 눈치껏 얼버무리며 하는 거절을 넘어 공식대로 하는 '우아한 거절'을 연습해 보기로 했다.
1단계, 먼저 스케줄을 확인해 보고 2단계 메시지를 보내겠다며, 급한 일이 있는 양 부탁을 빠르게 일 단락했다.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속내를 들키기 전에 순간을 황급히 넘겨야 했다.
저녁 즈음에 동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3단계 일정을 확인해 보니 그날 선약이 있었는데. 4단계 깜빡 잊고 있어서 나도 실수할 뻔했다며 5단계 혹시 약속이 변경되면 다시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6단계그리고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근황을 물었다. 그런데 가족처럼 여기는 반려견 똘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 말에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마음을 다잡고, 내가 알고 있는 동물 병원 정보를 알려주었다. 덧붙여 똘이가 곧 나아질 거라고 위로해 주었다. 내가 소개해준 동물병원 정보를 직장동료가 매우 고마워하며 메시지를 끝냈다.
공식대로 해본 거절은 아주 만족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거절하는 것은 순간적인 눈치가 아니라 말기술을 익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료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7단계에 걸친 공식대로 거절을 해본 결과 우리는 서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는 더 이상 거절 때문에 포도 알맹이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거절은 상대가 나의 고유의 자리를 넘어 들어오려고 할 때, 선을 긋고 물러서게 하고 존중을 요구하는 말로
'나를 보호하는 일'이다.
거절은 살면서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미리 거절의 공식 7단계를 익혀 두면, 위기가 순간이 기회로 탈바꿈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