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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순응 (4)

무기력이 햇살보다 익숙해졌던 날들의 기억

by 희소

아버지는 잠실동의 학원장이었다. 잠실동이라고 하면 서울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학군이지만, 아버지의 학원은 중심가에서 두 발 치 정도 멀어진 곳에 있는, 사실상 주소만 잠실인 느낌이었다. 2분만 걸어도 눈앞에 펼쳐지는 빼곡한 학원 중심가에는,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유명한 학원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들에 밀려난 외곽에 있다고 해서 딱히 열등감이라든지, ‘잠실’이라는 주소가 주는 우월감이라든지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이야 너 잘 사나 보네’ 하는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멋쩍음을 느껴 텅 빈 미소로 응대할 뿐이었다. 나는 그런 멋쩍은 미소를 꽤나 자주 지었는데, 어머니는 매번 나의 그런 가식을 지적하곤 했다. 진실하여 보이지 못할뿐더러, 그런 어색한 표정이 남한테 어떤 형태로든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난 내가 짓는 미소의 가식을 노력해도 스스로는 끝끝내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식을 지워 진실됨에 가까워지기보다는 미소를 지우는 방법에 몰두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세상은 마치 예정된 일이라는 듯, 아버지의 그 학원에 나를 집어넣었다. 학원장의 아들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범상했고, 그렇기 때문에 또 범상치 않은 부분이 공존했다. 어린 시절부터 압박 없이 자유롭게 생활하던 내가, 어머니의 교육 아래 처음으로 반에서 1등을 해본 적이 있었고, 사람들은 당연하다시피 그 공적을 아버지에게로 돌리고, 이유를 그 학원에서 찾았다. 공적과 이유가 한 데 융합되어 ‘학원장인 아버지’라는 것이 나의 이름 앞에 붙은 순간 알 수 없는 텅 빈 마음이 내 몸을 휘감았고, 바로 그 순간부터 멋쩍은 미소가 내 표정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도 아니었다. 단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표정을 비웠다. 상대에 대한 일말의 예의를 차리고자 슬쩍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잠실 안쪽 골목길의 학원 건물 계단을 턱 턱 소리 내며 올라갈 때면 밟힌 대리석부터 밟힐 대리석까지 공포스럽게 공명하며 진동했고 마치 온 건물의 학생들이 내가 입장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듯한 수치심이 문고리를 냉각시켰다. 냉기가 손에 휘감김과 동시에 몸과 얼굴을 타고, 구안와사가 오듯 자동으로 텅 빈 미소를 얼굴 근육에 끼웠다. 학원이 싫은 건 공부가 싫은 것에 대한 핑계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아버지께 크게 혼나는 날이면 배울 자격도 없다며 학원에 나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들만큼 행복한 날이 없었다. 어른들 앞에서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표정으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해놓고 뻔뻔하게 다시 학원에 다니게 해 달라는 말은 도저히 못 해!’ 등의 말을 속으로 되뇌며 미간을 찌푸리기만 하면 잠깐의 몰입에 대한 후유증 외에는 날 짓누른 돌덩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다만 이런 소소한 일탈도 길면 눈치가 보이는 만큼, 잘 조절해 가며 휴가의 길이를 조절했다.

학원이라는 장소와 더불어 방학이라는 시간이 맞물리면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애주가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애주가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하다. 애주가는 술을 ‘즐겨’ 마셔야 하는데, 아버지는 어떤 행복도 일탈도 아닌 쾌락의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의무감 하나로 소주에 절인 삶을 살았다. 사실 그 이전부터 아버지의 이런 알코올 의존증은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방학 때 첫 수업으로 아버지가 등장하고 그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내뱉는 날숨 하나하나마다 담긴 약 17도가량의 알코올 기체, 아직 벌건 빛으로 패인 볼, 기름지고 뻗친 머리카락, 미세하게 잠기고 쉰 목소리, 그 지옥 같은 아침 수업.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의 의식이 지옥과 학원 중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 파악하느라, 아버지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 학생의 눈빛, 말투, 행동 모든 것에 신경을 쏟고 있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그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제발 조금이라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계속해서 온몸을 움직여줬으면 좋겠다. 모니터와 책, 종이 뒤에 확실히 숨어서 강의를 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한껏 충혈된 실핏줄을 저 학생이 알아채는 순간이 온다면, 이상하게끔 자신을 힐끔거리던 원장 아들의 행동마저 그제야 이해가 될 것이고, 이 몰상식한 부자를 어떤 가족 사기단으로까지 생각할 것만 같은 느낌에. 그것만은 아니라고, 학생이 알아채는 순간,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내가 먼저 공감을 표하듯, 아버지께 ‘어제 술을 많이 자셨냐.’고 장난식으로 핀잔을 주어야겠다! 그 타이밍만 수도 없이 재며 속으로는 그 변명에 대한 예행연습을 되풀이했다.

몇몇 학생들이 나에게도 일정한 거리감을 두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다고 해서 철없이 다른 학원에 다니게 해달라거나 혼자 공부하겠다고 선언할 수도 없었다. 내가 내밀 수 있는 보증이라고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성적표였고, 단지 텅 빈 미소로 학원 계단을 오르는 것이, 조금 더 쾅쾅대며 계단을 오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시위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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