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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매니아 Apr 11. 2022

말로 상처를 주는 사람들

날것의 언어폭력에서 마음 지키기

        봄이다. 

        한국의 예쁜 벚꽃에 비할 것은 못되지만, 내가 사는 이곳 남프랑스의 거리에도 봄꽃들이 활짝 폈다. 과배란 주사로 호르몬이 널뛰기하던 시기도 무사히 지나고 난자 채취 후 무거웠던 몸도 어느 정도 이전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또 한 가지 변화라면 프랑스에서는 이제 의료시설과 대중교통 이외 모든 실내공간에서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스크를 벗고 생활하니 낯설기도 하고 입을 것을 입지 않은 듯한 부끄러움도 든다. 마스크 안에서 자유롭게 하품도 하고 상사 욕도 하던 시절이 지났으니, 괜스레 표정에도 신경을 쓰게 되고 새벽 출근 직전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보게 되었다. 

  

따스한 봄 햇살을 맞으며 퇴근하는 게 가장 즐거운 요즘

        불행히도 마스크 비의무화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끝까지 버텼던 사람들까지 코로나에 두 손 들게 만들었다. 대학 부설 어학원의 수업이 강사들의 코로나 확진으로 몇 차례 취소되었고, 생또방의 엄마 클레유가 자녀들의 코로나 확진으로 일주일간 출근을 못한데 이어 셰프 아따나스까지 확진되었다. 잇단 직원들의 결근으로 시간을 앞다퉈 일하는 주방의 긴장감은 더 팽팽해졌다. 마스크를 벗고 나서 생긴 또 다른 부작용은 동료들의 말을 더 잘 알아듣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을 더 잘 알아듣게 됨으로써 못 알아듣는 척해야 하는 상황도 더 늘었다는 것이다. 


        셰프의 빈자리를 지켜야 하는 부 셰프 니콜라스는 경력 20년 차의 파티시에다. 그의 장점은 일을 빠르게 한다는 점. 빨리빨리가 최우선인 주방에서 그 장점은 꽤 잘 통해서 20년간 쉼 없이 일할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을 빠르게 '잘' 하는지를 따지자면 1년 차 어프헝티인 내가 봐도 고개가 좌우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늘 지저분한 주변, 경력을 의심케 하는 글리사쥬, 본인의 계량 실수로 많이 남은 크림을 감춰뒀다 셰프 몰래 어프헝티에게 시켜 버리게 하는 갑질은 그렇다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건 쉬지 않고 떠드는 입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말이 참 많다. 하지만 7시간 근무시간 중 7시간 내내 말을 끊임없이 하는 건 프랑스 사람들 중에도 찾기 힘든 케이스일 것이다. 그 대단한 일을 니콜라스는 해낸다. 100킬로가 넘는 큰 체구에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다른 직원들과 쩌렁쩌렁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정작 잘 지켜봐 줘야 하는 어프헝티들이 그의 지도를 기다리다 어쩔 수 없이 일을 알아서 하다 간혹 실수라도 하면 발로 괜히 애꿎은 그릴들을 쓰러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초반에 그가 큰 소리로 외치는 버터 몇 그램, 크림 몇 그램 숫자를 알아듣기 힘들어 서랍장에 있는 공식 레시피북을 참고해서 키쉬 어페유에 우유를 더 넣어 묽게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 레시피북에 잘못 표기되었던 것을 새내기인 내가 알리가 있을 턱이 없었고, 그걸 갖다가 본인 말을 안따르는 괘씸한 어프렁티라며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웠다. 불어를 잘 못 알아듣는 것도 어쨌든 내 실수이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꾹꾹 누른 채 이를 앙 다물고 일을 해냈다. 해냈다기보다는 버텼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사실 이날 니콜라스의 고함소리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한건 그의 폭언 때문이 아니라 그를 통해 떠오르게 된 몇몇의 얼굴들 때문이었다.         


        특수학교에서 일을 시작한 첫날, 3월 개학을 앞두고 학생들 반편성 문제로 고3 담당 선생님들 모두 교감실로 호출되었다. 나와 같은 날 학교로 부임한 교감은 그보다 더 학교 사정에 밝은 교사들 앞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싶었는지 문 앞에 교사들을 세워두고 다짜고짜 교무수첩을 던졌다. 수십 년 경력의 부장교사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교감의 고성을 들어야 했다. 장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무리에서도 이런 폭력이 난무하는구나 라는 걸 깨달은 찝찝한 시작이었다. 민원 없이 조용히 승진만 잘하고 싶었던 그 교감 아래에서 많은 교사들이 전근을 가거나 병가를 내거나 하나 둘 학교를 떠났다. 뒤이어 온 교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교사의 이름을 학생들 앞에서 반말로 부르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고, 몸이 아픈 교사에게 면전에 대고 '아이 낳기는 그르게 생겼다'라든지 시각장애 교사 눈앞에서 손을 흔들며 '진짜 안 보이는 거 맞아?'라고 묻는 등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시각장애 교사로 눈보다 오히려 마음에 더 큰 병이 있던 동료 교사는 다른 교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무릎 꿇고 사과하라는 등 날 선 말로 상처를 줬다. 5년 넘게 한 학교에 있으면서 여실히 배운 교훈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거였다. 말로 베인 상처는 오래간다. 살에 베긴 상처는 딱지가 지고 아물 수 있지만 마음에 받은 상처는 보이지 않아 치료하기 더 어렵다. 그런데 진짜 이렇게 더러워서 피한 탓에 남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는 이 '똥들'은 본인의 과오도 모른 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괜히 성가시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넘어가면 다 좋은 거라고 믿고 피했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또다시 그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프랑스의 남부 도시, 이른 새벽 제과점의 주방에서 니콜라스의 폭언을 들으며 한국의 특수학교, 교무실 선생님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과거에 조용히 참고 넘어갔던 내 잘못이다. 그때 아닌 건 아니었다고 말하고 제대로 사과받았으면, 현재의 나도 니콜라스에게도 당당히 폭언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참는 것도 버티는 것도 제대로 된 방법은 아닌 것이다. 새내기 교사라고, 견습생이라고, 말 잘 못하는 외국인이라고, 사회적 약자라고 늘 상처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데 말이다.


        우리 반 2006년생 십 대 학생들도 상황은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주방에서 어린 학생들은 어른들의 폭언에 상처받고 좋아했던 제과 공부를 포기하곤 한다. 학교에 와서야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들에게 울며 하소연하거나 학교에 도움을 청해도 회사를 바꾸라는 조언밖에 학교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봄에 피어나는 꽃처럼 예쁜 어린 학생들이 나처럼 또 상처받고 무뎌지는 게 마음 아프다.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꽃처럼 예쁜 우리 반 아이들. 

        '나에게 소리 지르지 마세요! 잘못한 게 있으면 제대로 가르쳐주세요.' 불어 문장을 마음속으로 되뇌어 본다. 내일 출근하면 꼭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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