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나의 목표는 프랑스 제과사 국가자격증 CAP Pâtissier를 취득하는 것이다. 긴 여정의 반이 흘렀고, 아직 반이 남았다. 당장 제과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눈앞에 놓인 큰 목표이기에 달려가고 있지만 자격증 취득 후 무얼 하면 좋을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만 서른셋, 동갑내기이자 어프헝티 동기인 클레유와 필립의 생각이 궁금했다.
십 대 어프헝티들과 달리 공부를 늦게 시작한 늦깎이 학생들은 공부를 오래 하기에도 부담인 게 매달 지출해야 하는 생활비며 갚아야 할 대출금 등등 현실도 생각해야 하고, 더욱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라면 진지하게 고민될 수밖에 없다. 더 발목을 잡는 건 이제 막 CAP를 취득한 경력 1년 차 새내기 제과사/제빵사로서 취업시장에 설만큼 진짜 준비가 되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드는 두려움일 것이다. 클레유는 7월 말 생또방을 떠나 다른 제과점에서, 필립은 계속 생또방에서 제빵사로 일하며 상위과정인 MC 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취업 전선에 나서기 전 1년간의 유예일 수도 있겠지만 현직에서 일하다 다시 어프헝티로 돌아가기에도 쉽지 않은 결정이므로 한번 공부를 시작한 이상 계속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나에겐 얼마간의 시간이 더 남았을까? 언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당장 임신과 출산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5년 이상 걸리는 BTM 과정까지 공부하는 건 무리일 것 같다. 만약 1년간 더 공부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답은 셋 중에 하나다. 클레유처럼 다른 제과점을 찾아 제과 MC 공부를 계속하거나 CAP 초콜라티에에 도전, 혹은 지금의 생또방에서 제빵사 CAP에 도전하는 것.클레유가 요새 다른 제과점을 알아보는 이유에 나도 많이 공감하는 게 생또방이 생산하는 케이크 품목이 매우 한정적이고 단순해서 더 다양한 케이크들을 접할 수 있는 다른 업장으로 옮기는 게 자기 발전을 위해 더 좋을 것 같다. 초콜릿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려 해도 지금 업장에서는 초콜릿을 사용하는 제품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솔직히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것도부담이긴 하다. 이미 경력이 있다 해도 30대 이상 어프헝티를 반겨줄 업장이 많지는 않으니 말이다. 새벽 출근길, 가게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는 짧은 찰나, 먼저 출근한 제빵사들이 만든 빵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소한 빵 냄새가 기분 좋게 내 코를 간질였다. 프랑스 빵은 단맛이 나지 않는 식사용 빵이다. 고로 내가 아는 빵이라곤 한국에서 자주 먹던 한국식 식빵인 뺑드미 pain de mie랑 바게트 정도... 이왕이면 제빵도 배워보는 게 어떨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욱이 우리 매장은 바게트 tradition이 맛좋기로 소문난 곳이지 않은가? 걱정되는 거라면 제과보다 체력적으로 더 힘들고 무거운 것도 많이 날라야 한다는 점인데 고민만 하지 말고 한 번 날을 잡아 내가 진짜 제빵을 할 수 있을지 알아보기로 했다.
운 좋게 주말 휴무가 잡힌 지난주 금요일. 제과 업무를 모두 끝내고 오후 제빵팀 필립과 쿼헝팅에게 제빵일 좀 경험에 볼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웃으며 흔쾌히 허락해 준 친구들! 그리고 정식으로 제빵실에 발을 들였다! 우리 매장은 제과팀과 제빵팀이 일하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어 지나가다슬쩍 보거나 소금을 얻으러 제빵실에 가보긴 했어도 일을 하러 들어가 본 적은 처음이었다. 내부가 좁고 많이 낡지만 적게는 1명, 많게는 4명이 일하는 곳이며 하루에 몇 백 킬로 이상의 밀가루가 빵으로 변신하는 곳이다. 우리 매장의 한 가지 특색이라면 제빵실이 판매대 바로 뒤에 있어서 나름 오픈 키친으로 고객들이 제빵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른 장점이라면 제빵사들 모두 언어나 행동을 조심한다는 것, 단점이라면 빵 반죽을 가득 채운 그릴을 머리 위로 들고 판매직원들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 오븐까지 가는 길이 꽤 험난하다는 것이다. 몇 번 바게트 그릴을 들고 오븐까지 걸어가는데 그릴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팔이 후들후들 떨렸다. 왜 그리도 제빵사들 팔이 우락부락 근육질인지 이해가 되었다.
260도에서 22분. 바게뜨의 변신은 무죄
오븐에서 갓나온 바게뜨만큼 맛있는 케이크가 세상에 있을까? 뜨거운 바게뜨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서 정리하는 쿼헝팅
제빵에는 많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다. 제빵사의 손이 9할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한 일은 버터 대신 식물성 마가린을 이용한 비건 반죽으로 비건 버거와 비건 뺑드미 그리고 비건 핫도그 빵을 만드는 것이었다. 같은 반죽인데 성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빵으로 재탄생하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올리브유를 넣은 피자 반죽도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대망의 바게트 트라디시옹 작업. 엄청 큰 반죽기계에 밀가루 100킬로를 넣고, 온도를 맞춰주기 위해 얼음도 넣고, 생이스트와 소금, 그리고 pâte fermentation이라는 영업비밀 반죽을 넣고 일정한 속도로 돌려주면 총 180킬로, 500개 분량의 반죽이 완성된다. 이 반죽을 6.5킬로씩 플라스틱 통에 나눠 담는데 손으로 머리채 잡듯 들어 올린 반죽이 워낙 무거워 몸이 다 휘청했다. 이 작업을 다 하고 나니 온 몸에 땀이 흐르고 11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이 일한 게 실감 났다. 휴지와 발효, 성형을 거쳐 아기 엉덩이처럼 부드러워진 반죽을 오븐 판에 올리고 얇은 칼로 칼집을 내주는 게 가장 즐거운 작업이었다. 수평으로 살짝 낸 칼집을 따라 예쁘게 벌어진 바게트, 갓 나온 바게트에서 나오는 열기와 고소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오븐에서 꺼내다 부서진 바게트를 입안 가득 베어 무니 필립이 내 얼굴을 보고 '이게 제빵의 맛이야'라고 환히 웃었다. 설탕을 가득 넣은 여느 케이크보다 맛있고 달콤했다.
제빵 일일 체험 후 내 손.
제빵은 과묵하고 듬직하며 단순할 것 같지만 나름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하는 분야이다. 힘들지만 매력적인 제빵.. 과연 나는 제빵 공부를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