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이유들
혼자 남았다.
사업 확장 욕심이 큰 우리 사장은 1호점인 우리 가게를 시작으로 5년 만에 4곳의 매장을 오픈했다. 5년 만에 4곳이라니 놀라운 성장세이다. 10년 안에 20개의 매장을 인수하는 게 목표인 사장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바캉스와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욕심'이다. 구멍 난 흰 티셔츠, 10년은 더 되어 보이는 체크무늬 조리복에 머리엔 하얀 밀가루가 가득 묻어있고, 큰 덩치에 매달린 작은 책가방의 끈은 언제라도 끊어질 것 같이 위태롭다. 15살에 중국에서 헐헐단신 유학을 와 22년 후, 툴루즈에서 가장 줄이 긴 제과점의 주인이 된 사장은 겉모습만 봐서는 성공한 사업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제빵과 제과 분야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 프랑스에서 제빵을 전공한 사장이 4곳의 매장의 제과 파트까지 다 관리하기에는 무리이다. 그래서 능력 있고 경험치 많은 셰프 파티시에가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갓 구운 맛 좋은 바게트는 손님을 불러 모으지만 가격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빵으로는 이윤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저녁에 먹을 바게트를 사러 왔다 충동적으로 디저트로 먹을 케이크까지 사가는 손님들 덕분에 이윤이 남는 구조인 셈이다. 그 매출이 모이고 모여야 다른 매장을 또 인수할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셰프 파티시에의 입김이 제법 센 편이다.
4곳의 매장 중에 케이크를 생산하는 파티스리 labo가 있는 곳은 Saint Aubin과 Saint Sauveur 두 곳뿐이다. 이 labo들에서 생산한 케이크는 매일 아침 4곳의 매장으로 나누어 들어간다. Saint Aubin의 셰프는 아따나스, Saint Sauveur의 셰프는 M. 이 둘이 데리고 있는 팀원만 직원 2, 어프헝티 6명 총 8명이나 된다. 어프헝티 즉, 견습생으로 일을 시작한 지 딱 1년이 된 오늘, 6명의 어프헝티 중에 어째서인지 나만 남았다. 이유를 찾아보자면 첫째, 나의 사수이자 셰프인 아따나스는 매일 같이 관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파티시에가 직업으로 얼마나 고되고 힘이 들고 짜증 나는 일인지 사장이 얼마나 비협조적인지 매일같이 불평을 늘어놓는데, 어프헝티를 가르치는 걸 다른 어프헝티에게 맡길 정도로 어프헝티의 발전에는 무관심하다. 본인 일을 증오하는 셰프의 유일한 장점은 칼퇴가 가능하다는 것 정도? 2년 가까이 어프헝티로 일했던 로렌은 자격시험이 끝나자마자 조리복도 탈의실에 버려둔 채 편지 한 장으로 계약을 종료했다. 지금은 캠핑용 트레일러를 구입해 프랑스 전역을 여행 중이다. 그녀의 퇴사 사유는 잦은 언어폭력과 그에 따른 정신적 스트레스였다. 나와 함께 제과 공부를 시작한 클레유도 역시 에어버스 사내식당으로 이직을 했다. 1년 더 함께 일하자는 아따나스의 권유를 뿌리치며 그녀가 한 말은 '흑인은 케이크 말고 샌드위치나 만들라던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더 이상 함께 일할 수 없다'였다. 사내식당 디저트로 멋진 케이크를 만들 일은 거의 없을지라도 좀 더 깨끗하고 차별 없는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싶어 했던 그녀에게 참으로 잘된 일이다.
반면 M은 말이 거의 없다. 자신의 레시피 노트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 그 누구도 그 노트를 만지는 걸 싫어한다. 그가 만든 케이크는 배우고 싶을 정도로 예쁘고 맛도 좋다. 맛있는 케이크로 순진한 아이들을 유인하는 마녀 같달까. 일하고 있는 어프헝티 뒤에 살짝 다가와 몸을 밀착한다. 안 그래도 좁은 주방에서 셔츠를 배꼽까지 풀어헤치고 일하는 M에게 성추행을 당한 어프헝티가 한 둘이 아니다. 도저히 쉬는 시간도 주지 않고 끝나는 시간도 일정치 않으니 어프헝티가 견딜 제간이 없다. 마지막 한 명 남았던, 끝끝내 버티다 못한 어프헝티가 사장에게 호소했다. 계약 종료 전 한 달만이라도 다른 곳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사장에게 문자가 왔다. 다음날부터 2주간만 Saint Sauveur에서 일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M과 단 둘이 일할 때에도 별일은 없었지만 사실 걱정이 앞섰다. 과연 괜찮을까? 왜 우리 셰프들은 욕쟁이이거나 변태란 말인가. 사장의 입장에서는 값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어프헝티보다는 돈을 잘 벌어주는 셰프가 더 중요하니 어프헝티들의 목소리는 들을 가치도 없는 걸까? 오히려 이만큼도 못 버티면 이 직업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상처를 줬다고 한다. 학생들의 불만을 보다 못한 학교에서 제안한 건 주방 안에 CCTV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Saint-Sauveur에서의 첫날. 그리도 두 번째 날. 다행히 아내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한 Jason도 함께 일하게 됐다. 어쨌든 혼자일 때보다는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2주 동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생또방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케이크들을 배워서 즐거웠다.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도, 불평도, 욕도, 심지어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여름 날씨가 무색할 만큼 땀도 흘리지 않으면서 일을 했다.
생또방에서 일하는 1년 동안 매일 같이 단순하고 똑같은 일만 반복해서 하느라 사실 지겨운 점도 있었는데, 어찌 됐건 새로운 환경에서 일할 때 그 매일같이 했던 단순한 일들이 쌓이고 쌓여 조금의 변형된 레시피도 곧 잘 따라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쯤 이런 케이크들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하고 좀처럼 오지 않는 기회에 답답했었는데, 7월의 마지막 2주 동안 꽤 근사한 케이크들을 만들 수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 휴가 전 날. 사장이 휴가 잘 보내라며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줬다. 2주 동안 혹시 불쾌한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매일같이 와서 확인하고 설거지도 해주며 나름 신경 써준 것에 나도 감사를 표했다. 사장의 대처는 아쉬운 점도 많지만 어쨌든...
이로써 1년이란 시간이 끝이 났다. 2주간의 여름휴가 후 다시 시작이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계약이 1년뿐이었다면 과연 나는 이곳을 떠났을까 남았을까?